“ 길을 알려주지 않겠나. ”
외관
맹금(@sea_osprey)님 커미션입니다.
부유한 이들은 그를 동정하거나 멸시했다. 가난한 이들은 그를 우둔하고 한심스럽게 여겼다. 부모들은 소란에 이끌려 고개를 내미는 아이를 황급히 등 뒤로 감추어 숨겼다. 개중에도 은화 몇 닢을 던져주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더러는 그에게 돌을 던지고 침을 뱉었다. 그럼에도 그는 아랑곳 않았다.
낡고 해져 부스러지고 때가 탄 로브, 가시덤불로 얼기설기 엮은 엉성한 이갈, 온 몸을 조악하게 칭칭 감은 붕대. 몸에서는 케케묵은 모래와 흙먼지 냄새가 났다. 이지러진 눈가는 덥수룩한 검은색 머리카락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모래알에 짓이겨진 붕대가 감긴 맨발에는 온통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그야말로 영락없는 거지의 행색이나, 첫눈에 시선을 이끄는 화려한 목걸이만큼은 달랐다.
바르질라의 번화가를 거니는 이라면 누구나 두 해쯤 전부터 저자에 만연하던 저주받은 보석의 맹약자 이야기를 알았다. 금방이라도 꺾일 듯 광란에 취해 비틀거리는 걸음, 허상에 갈급해 갈라지는 손 끝. 목소리는 언제고 바위에서 흐르는 수맥과 같이 광상으로 나지막히 들끓었다. 오로지 사막의 모래바람에 머리칼이 흐트러질 때에만 가려진 눈동자 한 끗이 드러났다.
광인, 요하난. 보석을 닮아 산란하는 붉은 눈이 그 맹약의 증거다.
성격
힘 없는 정의 | 지혜 없는 베풂|무능력한
저주받은 보석의 맹약자가 초라한 행색으로 바르질라 도심을 거닌다는 소문이 돌았던 것은 대략 2년 전 연초 무렵이다. 기실 아그립냐에서 맹약자의 안위 따위에 크게 신경을 쓰는 이는 없었으므로 기거하는 이들 대개가 그 소문을 무시하고 지나쳤지만서도. 불면의 땅, 불빛 꺼질 일 없는 한낮의 나라. 한낱 일족의 배신자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기에 아그립냐는 지나치게 번화한 곳이었다. 그럼에도 유별난 점이 한 가지 있다면 그 누구도 이 떠돌이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은화 한 닢조차 없는 알거지. 쉴새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허공에 묻는 자 없는 대꾸를 돌리고, 하얗게 까지고 쓸린 상처 위를 때 낀 손톱으로 긁어댄다. 허나 영락없는 광인의 행색을 한 소년은 뜻밖에도 바르질라 안팎의 사정에 밝았다. 제아무리 허무맹랑한 광상만 늘어놓는다 한들 상인의 억양을 감출 수는 없다. 비단의 값어치를 속여 파는 사기꾼의 뒤통수를 지팡이로 거세게 훌치고는 크게 꾸짖은 일도 있었다 하던가. 물론, 정작 대부분의 바르질라 시민들이 기억하는 것은 이후 그 맹랑하기 짝이 없는 거지가 사기꾼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쫓겨났다더라 하는 후일담뿐이었다.
소년은 뒤집어쓴 땟국물과 모래 먼지 사이로 토호의 기색을 풍겼다. 상가에 오래 몸담지 않은 이상 알 수 없는 것들, 나서부터 땡볕과 모래 바람을 헤치고 살아온 이들만이 알 수 있는 것을 소년 역시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그립냐의 어떤 이도 거지 소년이 누구인지 입 밖으로 일컫는 일이 없었다. 닮은 얼굴은 있을지 모르지, 혹자는 말한다. 그러나 적색으로 산란하는 그 과분한 눈알의 출처를 아는 자는 이 땅에 어느 한 명 없다. 맹약으로 두 눈동자가 어그러진 뒤 아무도 소년의 뿌리를 모르게 된 탓이다.
그러므로 2년 전의 천도일 전야, 소년이 바르질라 도성 바깥으로 쫓겨나던 날, 그 누구도 뿌리조차 모르는 이 거지 소년을 선뜻 감싸지 않았다. 본성이 선량하기야 했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해줄 힘이 없어 죄 허사였고 수포였다. 신께서는 긍휼을 원하시며 결코 제사를 원치 아니하신다. 황금의 시대, 고룡의 치하를 인간은 까맣게 망각한 것인가. 어찌하여 귀룡을 위한 제물을 바쳐야 하는가……. 광인은 외쳤다. 허나 소년은 선도자조차 되지 못한 바, 누구도 이를 모르는 자 없었다.
핍박의 연유 따위 알 일인가, 인간이 제아무리 제 힘으로 저항한들 종의 존폐는 끝내 귀룡의 손에 달려 있었다. 납작 엎드려 반기의 때를 노리는 것만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저항의 전부였다. 우리 모두 알아, 한심스런 일족의 배신자 같으니! 선지자 된 양 고고한 척하기는! 모두 알고서도 행하는 것이라고. 아니면 네 대신 죽은 짐승 사체가 되어 저 마수에게 바쳐질 테냐. 이제 우리 중 누구도 더 이상 너를 가엾게 여기지 않으리라. 썩 꺼져라, 소년아. 떠나서는 어딘가로 사라져버려라…….
물정 모르는 광인은 몰매 끝에 사막 외곽으로 쫓겨났다. 산 자들은 곧 거지 소년을 잊었다.
샤먼
이지러뜨리는 광상은 곧 피가 되어 흐른다.
네게 행해졌던 대로 네가 행할지어다.
기타
낙오자들의 무리, 놋.
불면하는 바르질라 바깥, 아그립냐 남방의 사막에서 떠도는 이들의 무리. 독립해 정착하여 씨족을 이룬 이들과 다르게 서로 피가 섞이지 않은 방랑자들로 이루어졌다. 놋의 규칙은 단 두 가지―이름을 묻지 않을 것. 그 누구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일 것. 그리하여 놋의 대부분이 파릇한 청년 혹은 노인이었고, 그 중 상당수가 수 해를 채 견디지 못하고 도시로 돌아가거나 사막의 별 아래 명을 다했다.
가릴 것 없다―놋은 낙오자들의 무리다. 별과 환상종을 좇아 맨발로 사막에 뛰쳐나온 청년들이 놋에 있었다. 바르질라의 소란에서 빠져나와 발 닿는 곳으로 달아난 도망자가 놋에 있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스스로 등 뉘일 황야를 찾는 노인들이 놋에 있었다. 놋은 앞날 없는 자 누구든 공평하게 수용했다.
허나 그렇기에 놋은 단단한 발 가죽과 질긴 어금니를 갖지 못했다. 별을 나침 삼는 데 서툴렀고 가뭄 속에서 물을 찾는 법을 몰랐다. 모래 폭풍의 전조를 듣지 못했고 식시귀의 울음에 겁에 질려 쉬이 도망쳤다. 그들 중 운이 좋은 몇몇은 사막의 씨족에 새로운 피로써 편입되었으나 대다수는 황야를 헤매다 한 줌 모래로 흩어졌다. 놋은 씨족을 이루지 못했다. 그저 유지될 뿐이었다.
소년 역시 놋이었다. 도성에서 쫓겨난 이래 줄곧 놋으로 살았다. 놋은 이름을 묻지 않기에 놋만의 이름이 있었다. 놋이기를 포기하면 사라질 이름이었다.
―바르질라의 청년인가. 네 별을 더듬으러 왔는가, 모래 밑에 몸을 숨기러 왔는가.
―혹은 답을 찾으러 왔는가.
―이름은 묻지 않으마.
―요하난.
―요하난으로 하자.
황야 위의 선지자.
헛된 바람, 무익한 신기루, 뜬구름 잡듯 허황하며 망령된 희망. 소년―요하난은 줄곧 그러한 것들을 꿈꾸며 산 적 없는 황금의 시대를 그리워하곤 했다. 비록 저 자신은 맹약한 환상종에게 제대로 된 답 하나 돌려주지 못해 제 몸 하나 건사하는 것이 고작이었음에도 그러했다. 약속받은 땅은 언제고 그에게 까마득히 멀었으나, 요하난은 일찍이 선조가 앗겼다는 그것을 되찾을 수 있기를 줄곧 희망했다.
―고룡의 치하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두 눈으로 목도한 적도 없는 주제에 습관처럼 그리 지껄이는 노릇을 볼 때마다 다른 이들은 으레 조롱으로 일갈할 따름이었다. ―너는 스케네마에서 태어나는 게 나았겠는데. 하다못해 돌랄이나……. 그나마도 그가 낙오자들의 무리에 섞인 이후로는 맥없이 끊겼다. 놋은 하나같이 무력의 정서에 매몰되어 귀룡의 압제에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조소 섞인 음성으로 소년을 비꼬아 일컫는 말만이 남았다. 눈 먼 현인, 무능한 선도자, 그래, 아주 선지자 납셨군그래…….
실로미트의 맹약자.
놋에 막 다다랐을 적 요하난은 아직 열여섯의 소년이었다. 초라한 행색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목걸이를 두른 채였다. 한눈에 봐도 거지나 다름없는 소년이 목걸이를 빼앗기지 않은 것은 바르질라의 번화가에 도는 풍문 덕택이었으므로, 놋의 이들 중에서도 그 소문을 아는 자가 더러 있었다. 그러나 받아들일 이를 가리지 않는 것이 그들의 규칙이었기에 소년은 놋의 일원이 되었다.
비록 이름을 묻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 하나 이전의 삶에 대해서도 모르쇠, 간단한 신변 잡기에도 모르쇠로 일관한다. 그는 마치 요하난이 되기 전의 인생은 완전히 잃은 양 굴었다. 어린 날의 편린이 아주 남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나마도 사막을 횡단하는 상인과 마주치면 어쩌다 한 번 잇새로 쉰 목소리가 울컥 새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한때나마 보석상의 장자로 살았지. 허나 전부 옛된 일이야.
하여 그는 실로미트의 맹약자, 요하난으로만 살았다. 병적인 기록의 흔적은 분명 곳곳에 남아 있다. 손 곳곳에 박인 굳은살이 자리한 위치나, 결코 작지 않은 봇짐에 실린 필첩 무더기 따위가 그것을 여실히 증명했다. 두렵느냐 물으면 요하난은 답했다. 잊히는 것이 두려운 게 아니야. 잊는 것이 두려운 것이지.
망각을 염려하지 않느냐 하면 이는 거짓이다. 요하난은 다른 누구보다도 망각을 겁냈다. 그는 오직 무언가를 기록할 때에만 어리석고 지리멸렬한 광인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으로 보였다. 이지를 잃은 얼간이답게 그는 많은 것을 자주 잊었다. 사람 꼴을 갖춘 대화를 나누려면 와중에는 필첩을 손에서 놓을 수조차 없었다. 기록을 등지면 목숨 건 맹세조차 무심코 뒤집는 것이 미치광이의 성정이었으므로.
그러나 요하난은 잊힘을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쫓겨난 자, ■■■■.
너는 이미 나를 잊었을 테야.
나를 잊었을 터다.
실로미트
찬란함도, 부유함도, 눈과 귀조차도 끝내는 모두 헛된 것.
지닌 자에게 지고의 아름다움과 끔찍한 불행을 함께 가져다 준다는 저주받은 다이아몬드. 허나 그 진정한 정체는 끊임없는 환청과 환각이 만발하여 보석의 소유주를 광란으로 몰고 가는 현상이다. 직접적으로 정서를 유도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환영이 멎지 않는 한 범인은 그 그림자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한다.
보석의 아름다움에 혹하는 것도 잠시, 머지않아 환상종이 깃들었음을 깨달은 인간의 손에 의해 수도 없이 발각당해 내쳐졌으나, 결론적으로는 다시 이를 잊은 후세의 손에 몇 번이고 돌아오고 만다. 이는 곧 보석을 쥔 자 누구나 이지를 잃고 자멸한다는 해묵은 전설―불운의 보석이 품은 저주 자체가 되었다.
―첫째 주인은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지. 둘째 주인은 온 몸을 긁다가 미쳐버렸다더군. 셋째 주인은 광인이 되어 쫓겨났고, 넷째 주인은 가족을 잃었으며, 다섯째 주인은 죽고, 여섯째 주인 역시 죽고, 일곱째 주인은 미치고…… 여덟째, 아홉째, 열째 주인은 그 소식을 모르고, 열한째 주인은 귀룡의 제물로 팔려갔으며, 열두째 주인은 미쳐가던 끝에 겨우 보석을 내놓았다던가.
―너도 미치게 되리라, 요하난.
―너 역시 그렇게 되리라.
성질
악의를 품지 않는다는 것이 자선을 베푼다는 말과 동일하지는 않다. 결코 악하지는 않았으나, 그것의 성질이 지닌 핵심은 맹목적으로 소유자의 관심을 요함에 있었다.
눈길을 받지 못하면 금세 이골이 나고 마는 어린아이와 같다. 어떤 의미에서는 단어 그대로, 극도로 천진하다. 현상계 환상종이니만큼 그것의 행위를 욕망과 연관짓는 시도가 일체 무용할지는 몰라도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큼은 그러했다. 이는 종국에는 제 맹약자에 대한 각별한 관심으로 귀결된다.
그것은 모든 환각의 형태를 빌어 맹약자에게 말을 걸었다. 얇은 천이 마른 모래에 스치는 소리, 사막의 귀퉁이를 집어삼키는 모래 폭풍의 전조, 독니를 드러내고 쉭쉭대는 뱀의 비늘, 금붙이와 은화가 부딪혀 짤랑이는 마찰음, 찢어지도록 광소하는 여인의 비명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비극은 진의를 알 수 없는 망상이어야 할 그것을 맹약자만큼은 필연적으로 알아듣는다는 단순한 이치로 인해 발생했다.
덕택에 요하난은 맹약과 동시에 광증에 가까운 기벽을 선물받았다. 헛된 광상이어야 할 것의 의미를 자연히 알아듣게 되는 탓에 외려 이를 무시할 수조차 없었다. 스스로 목을 베지 않는 한 이 이물을 몸에서 떨어뜨리는 것 역시 불가했다. 밤낮없이 소란에 시달리는 자가 명석하기도 어려운 일 아닌가.
약속의 계기
일찍이 사건의 어떠한 전조도 없었다. 아그립냐의 이들이 으레 그렇듯 ■■■■ 역시 보석을 능히 깎고 다듬을 줄 알아 그것을 업 삼아 살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친지가 모두 그러했다.
그의 일가족은 보석을 세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감정하거나 되팔고, 교역에 손을 벌리는 것으로 밥을 벌어 먹었다. 결코 궁핍하지는 않으나 손 꼽히게 부유하지도 않은 그들에게 저주받은 보석은 위험천만했으나 동시에 매혹적으로 느껴지는 제안이었다. 그리하여 장자인 그가 대표하여 그 곳에 보내졌다.
아그립냐 바깥에서부터 먼 길을 건너 왔다는 보석의 매입은 신중하고도 조심스럽게 이루어졌다. 수 겹의 베일을 걷고 발 들인 천막 안에서 ■■■■는 그것을 만났다. 불운하기 짝이 없는 첫 조우였다.
첫눈에 그는 운명처럼 그것의 진정한 실체를 알아차리고야 만다―이것은 최초의 비극이다. 보석 이야기에 지나치게 밝았던 것이 문제일지도 몰랐다. ―첫째 주인은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지. 둘째 주인은 온 몸을 긁다가 미쳐버렸다더군. 과연 그러할 수밖에.
―셋째 주인은 광인이 되어 쫓겨났고, 넷째 주인은 가족을 잃었으며, 다섯째 주인은 죽고, 여섯째 주인 역시 죽고, 일곱째 주인은 미치고…… 두렵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마땅히 좌시할 수 없는 것 역시 있었다. 예정된 죽음과 안배된 광기를 외면하고 재물을 탐닉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무심코 의문해버린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다. 장고 끝에 그는 기어코 손을 뻗었다.
■■■■는 불운을 제 손으로 후세에 떠넘길 만큼 몰염치하지 못했다. 힘은 없었으나 얄팍한 선의는 있었고, 그것으로 촌극은 막을 올렸다. 땅에 계시가 내리듯이…….
―여덟째, 아홉째, 열째 주인은 그 소식을 모르고,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괜찮다.
―열한째 주인은 귀룡의 제물로 팔려갔으며,
―환상에 잡아먹혀 한낱 시체가 되더라도 좋다.
―열두째 주인은 미쳐가던 끝에 겨우 보석을 내놓았다던가.
―무엇이라도 좋다. 네가 원하는 것을 주마.
―네게 나를 바치리라.
후일 요하난이 될 소년은 자진하여 쟁반 위에 목을 잘라 바쳤다.
실로미트는 기꺼이 열세 번째 자리를 내 주었다.
배반자를 위한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