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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 가거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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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관

익명의 지인 분 지원입니다.


 

광상에 골몰하는 자 누구인가? 허황과 합일한 치 누구인가? 관리하지 않은 낯짝은 방치의 흔적을 여실히 드러낸다. 이지러진 눈가 위로는 덥수룩한 검은 머리칼이 흘러내린다. 소매에 가려진 팔목에는 갈맷빛 팔찌가 한 줄기 감겼으며 붕대 아래로는 물어뜯은 흉이 희미하게 남았다. 무덤이 된 지하는, 지금은 매몰되어 사라졌을지언정 그에게 명백한 흔적을 남겼다. 그리고 맹약의 주박은 더한 것을 남겼다.

 

낡고 해져 부스러지고 때가 탄 로브, 가시덤불로 얼기설기 엮은 엉성한 이갈, 온 몸을 조악하게 칭칭 감은 붕대. 몸에서 나는 마른 모래와 흙먼지의 냄새. 온통 굳은살이 박인 맨발과 저주가 휘감긴, 분에 넘치게 화려한 목걸이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 변함이 없었으나, 그는 바뀌었다.

 

보석을 닮아 산란하는 붉은 눈은 뙤약볕처럼 작열하는 광란으로 들끓는다. 허나 풍랑 속에서도 앞으로 내딛는 걸음에 미약한 흔들림조차 짚어낼 수 없다. 손 끝은 더 이상 허상에 갈급하지 않으며, 단호하고 지엄한 음성은 현실이 아닌 머나먼 이역의 것을 고한다. 사막을 떠도는 자들은 그의 곁에 다가가면 바위에서 수맥이 흐르며 호수가 반으로 갈라진다 떠들었다. 허나 실은 그것들 전부 일개 환각에 지나지 않았다. 주박이 기어코 답으로 맺어진 순간 육체가 광상의 원천으로 전락한 까닭이다.

일찍이 그를 알던 자들은 이윽고 알아차리고야 만다…… 선을 넘었다. 이지를 지니고 자문하는 이로서 갖추어야 할 것을 그는 기어이 저버린 것이다. 가려진 눈동자는 이제 사막의 모래바람에도 한 끗조차 드러나지 않는다. 어떤 것도 볼 수 없었으나 동시에 무엇이라도 볼 수 있었다. 다섯 감각과 물질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걸인은 인세를 버리고 형이상의 세계로 간다.

보아라, 광인 요하난이 이 곳에 있다.

맹약자

성격

관습적인 정의|만성적인 베풂|이지 잃은


 

어딘가 이상하다. 그러니까, 위화감이 느껴진다. 혹 이전의 요하난을 기억하는가. 힘이 없으나 정의롭고, 지혜롭지 못하나 베풀며, 무능할지언정 앞으로 나아가려 애쓰던 작자. 잊히는 것에는 미련 없으나 잊는 것만은 두려워하던 천치. 오직 기록만이 제 스스로를 이룬다 맹신하던 이. 그럼에도 제법 사려 깊고 다감했던 소년. 그런 것들을 요하난이라 일컫는다면 필시 이 자 역시 요하난이라 부를 수 있을 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달랐다. 그의 손에는 이제 힘도 깨달음도 주어졌다. 그러나 충만해야 할 기쁨과 자기 효능감은 어디에도 없고 텅 빈 폐허만이 남았다. 맹우 잃은 환상종이 그 자리에 남아 제 소양을 다하는 것처럼, 이미 죽은 넋이 제 살아 있다 믿고 생애를 취하려는 것처럼, 그 역시 ‘요하난’이 할 법한 일들을 고스란히 행한다. 정의로 말미암아 베풀고, 쉽사리 자선하며, 웬만해서는 타인을 잊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러므로 요하난은 이전 모습 그대로다―아, 더 이상 기록은 않던가.

 

허나 못내 그를 신뢰할 수 없는 까닭은 이 모든 것이 모방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여태 아무도 그를 잊지 않았으므로 요하난이 미처 죽지 못했음은 자명한데, 이상하게 그는 꼭 이미 죽은 사체가 살아생전 모습을 흉내내는 것처럼 굴었다. 요하난은 진중함을 잃었다. 성정의 문제가 아니었다. 삶에 무게가 사라졌다. 바람 불어도 그를 땅에 단단히 붙들어 놓던 것이 어느새 자취를 감췄다. 그래, 이지를 잃었다.

 

목전에 둔 자 이제는 완연한 광인이 되었음에도 소통은 어렵지 않다. 기실 의문해야 할 것은 소통의 가불가가 아니라 입 밖으로 흐르는 언어의 진정성이다. 정녕 진심에서 나오는 말이 맞는가. 과거를 모사하는 것뿐인 허울은 아닌가. 그리하여 너, 진정 내가 알던 요하난인가…….

 

연속성이 그를 증명한다면 비가역성이 이를 반증한다. 모든 것은 타의 해석에 달렸다.

황야의 떠돌이

샤먼

이지러뜨리는 광상은 곧 피가 되어 흐른다.

네게 행해졌던 대로 네가 행할지어다.

고약한 맹우 같으니.

이제 만족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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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유랑하는 이, 요하난.

 

석별 이후 십여 년간 그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요하난은 방랑하나 결코 잠적하지 않았다. 가르멜을 나온 직후 그는 여러 곳을 살펴 다녔다. 산을 올랐고, 초원을 걸었고, 바다를 마주했다. 사막 역시도 수 번 건넜다. 옛적에 제가 쫓겨났던 도성을 제외한 모든 곳에 적어도 한 번씩 들렀다. 심지어는 어느 한 곳에 눌러앉는 일까지 있었다. 식견을 넓히기 위해서라고는 했지만 지독히도 길었다.

 

그 작자가 아직 모두가 아는 요하난으로 남아 있었을 무렵에, 지극한 전란의 때에―그는 어떤 낯을 하고 있었던가. 돌이켜 생각해보면 영 불안해 보이기야 했다. 원체 무던한 체질이어서인지 열여덟 소년일 적까지만 해도 좀처럼 환각을 내색하지 않던 이다. 헌데 어느 때를 기점으로 점차 신경증적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느리지만 적실한 변화였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뻔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성정이 고약해진 것은 아니다. 분명 여전히 다감했다. 그러나 악몽을 꾸는 일이 잦아졌다. 허공에 한눈을 자주 팔았다. 무심코 헛소리가 튀어나왔으며 듣는 자 없는 대화는 버릇이 되었다. 사람 많은 곳에 나서는 일이 적어졌다. 지하를 떠난지 기어이 여덟 해가 지났을 무렵에는 매 순간이 광상과의 치열한 전쟁인 듯 보였다. 더러는 분노에 차 목소리를 높이는 일까지 있었다. 사라져라, 실로미트여, 사라지라니까! …….

 

그럼에도 요하난은, 실은, 유별나게 걱정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눈이 마주치면 희미하게 웃었고 예전처럼 온난한 말을 자주 늘어놓았다. 덥수룩한 머리칼 틈으로 보이는 눈동자는 비록 때때로 불안정하게 흔들렸으나, 아직 완전히 이지를 잃기에는 한참 일렀다. 오히려 겉모습만은 이전보다 말끔해 보이기까지 했다.

 

다시 묻는다: 청년의 낯을 기억하는가? 그 모습을 더듬고 있노라면 어찌 이리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흐트러져 있던 머리칼은 나이를 먹으며 되레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키가 더 크고 근육이 붙어 올곧고 다부진 체격이 되었다. 이제 와서 꺼내기엔 웃기는 말이지만, 그 때에는 면도도 제때 했다. 원한다면 연인을 만들 수도 있을 터였다―물론 굳이 그러지는 않았다. 요하난은 십 년간 투박하고 거칠던 걸인의 분위기가 가시고 다분히 타의 호감을 살 만한 청년으로 자랐다.

 

그리고 꼭 열 번째가 되던 해에, 그는 사라졌다.


 

황야 위의 선지자.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말 그대로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말 한 마디 안 남기고 어디로 떠났나 했더니, 별안간 바르질라의 번화가에 풍문이 돌았다. ―너, 저주받은 보석의 맹약자 기억하느냐. 열두 해 전에 도성에서 쫓겨났던 이 말이야. 그 작자가 지옥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왔다더라. 이미 죽은 줄 알았던 자를 일으켜 데리고 걸음했다던데. 그러고는 도성 안으로는 한 발짝도 들이지 않고 광야로 떠났다지.

 

소문은 진실이었다. 요하난은 돌연 방랑을 멈추었다. 그는 어째서인지 꼭 머나먼 옛 시절마냥 다시 황야에 머무르기로 다짐한 듯싶었다. 허나 예전처럼 낙오자들의 무리에 섞여 사는가 하면 그것은 또 아니었다. 놋에게 요하난의 행방을 물으면 그들 모두 예외 없이 고개를 도리질했다. 아니, 사실 그들은 요하난이 누구인지조차 몰랐다. 놋의 낙오자들은 언제나 지나치게 빠르게 교체되었던 터다.

 

전해 듣기로는 그는 사막을 홀로 떠도는 듯했다. 종종 곤란한 상황에서 그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경험담이 나돌기는 했으나, 대동한 일행이 있다는 말은 없었다. 그러니까…… 6년간은 줄곧 혼자였다.

 

그것은 방랑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스스로를 넓은 황야에 가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약속받은 땅으로는 가지 못하고 일평생을 광야에서 떠도는 얼간이처럼, 그는 사막에 붙박였다. 분명 어디로든 갈 수 있었을 터인데 어디로도 가지 않았다. 하여 사람들은 의문과 약간의 경외, 그리고 무엇보다도 몰이해를 담아 그를 불렀다―황야 위의 선지자라고.


 

실로미트의 맹약자.

 

황야 위의 선지자가 저주받은 보석의 맹약자임은 누구나 다 안다. 그는 결코 군사력으로서 집단에 몸담지는 않았으나, 길 잃은 치들을 여러 번 구했으며, 몇 번은 사막에 들이친 적들을 물리치는 데 손을 빌려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구원자를 꺼렸다. 그가 완연한 광인이기 때문이었다.

 

6년 전을 기점으로 기록조차 손에서 놓았다. 요하난은 환각에 저항하기를 완전히 포기한 듯 보였다. 아니, 실은 이 이상 저항하는 것이 무용하다 보아야 옳다. 광상이야말로 그가 가진 힘의 원천이다. 요하난은 비록 환영일 뿐이라지만 바위에서 수맥이 흐르게 하고 호수가 갈라지도록 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범인들이 그리 착각하도록 유도할 수 있었다. 환난을 일으키는 이 누구든 반드시 환난 안에 살아가야 함은 사실 당연스러운 이치다.

 

하여 이 변모는 오롯이 홀로 불가역적이다. 더 이상 분노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이지러뜨리는 광상은 곧 피가 되어 흐른다. 네게 행해졌던 대로 네가 행할지어다. 그렇기에 그는 곧 샤먼이고 사제다. 그가 여지껏 보아왔던 세상을 이제는 인세에 일으킨다. 지상과 동떨어진 이계가 이 자리에 명명백백히 현계한다. 바로 지금, 환상이 현실로 뒤집힌다. 그래, 그야말로……


 

사라진 자, 요하난.

 

우리는 이제 필히 바꾸어 질문해야 한다: 이것은 정녕 우리가 알던 요하난인가? 눈에 익은 편린은 분명 곳곳에 남아 있다. 상대의 의중을 신중히 살피는 버릇이나, 몸에 깊게 밴 듯한 친절이나, 옛된 약속을 똑똑히 기억하는 기색 따위가 특히 그러했다. 부치기로 한 파발은 매해 제 때에 도착했다. 등에 이고 다니던 필첩 무더기를 아직은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뿐이다.

 

두 눈은 더 이상 앞을 보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사방이 헛것이었으나 동시에 그 무엇도 헛것이 아니었다. 환상종의 진언은 더 이상 그를 괴롭히지 않는다. 삶이 제 자신을 괴롭힌다 이르는 얼간이는 세상 천지 어디에도 없다. 힘 얻은 자는 마땅한 대가를 삶으로써 치렀다.

 

광란은 요하난의 생이다. 주박은 기어이 결실을 맺었다. 요하난이 헐값에 바친 목을 실로미트가 거두었다. 우리가 알던 요하난은, 이제는, 차가운 은쟁반 위에 효시되었다.

 

어째서 있던 곳을 떠났어? 묻는 말에는 대답이 없다.


 

있잖아, 실은 떠나려던 것이 아니었어.

계속 이 곳에 머물까 했어. 감히 삶이 탐났어.

현인의 눈이 다 무슨 의미고 대가는 또 무엇이라고.

다만, 바람이 불어서……

크리쳐

실로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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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함도, 부유함도, 눈과 귀조차도 끝내는 모두 헛된 것.

 

지닌 자에게 지고의 아름다움과 끔찍한 불행을 함께 가져다 준다는 저주받은 다이아몬드. 허나 그 진정한 정체는 끊임없는 환청과 환각이 만발하여 보석의 소유주를 광란으로 몰고 가는 현상이다. 직접적으로 정서를 유도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환영이 멎지 않는 한 범인은 그 그림자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한다.

 

보석의 아름다움에 혹하는 것도 잠시, 머지않아 환상종이 깃들었음을 깨달은 인간의 손에 의해 수도 없이 발각당해 내쳐졌으나, 결론적으로는 다시 이를 잊은 후세의 손에 몇 번이고 돌아오고 만다. 이는 곧 보석을 쥔 자 누구나 이지를 잃고 자멸한다는 해묵은 전설―불운의 보석이 품은 저주 자체가 되었다.

 

―첫째 주인은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지. 둘째 주인은 온 몸을 긁다가 미쳐버렸다더군. 셋째 주인은 광인이 되어 쫓겨났고, 넷째 주인은 가족을 잃었으며, 다섯째 주인은 죽고, 여섯째 주인 역시 죽고, 일곱째 주인은 미치고…… 여덟째, 아홉째, 열째 주인은 그 소식을 모르고, 열한째 주인은 귀룡의 제물로 팔려갔으며, 열두째 주인은 미쳐가던 끝에 겨우 보석을 내놓았다던가.

―너도 미치게 되리라, 요하난.

―너 역시 그렇게 되리라.

성질

악의를 품지 않는다는 것이 자선을 베푼다는 말과 동일하지는 않다. 결코 악하지는 않았으나, 그것의 성질이 지닌 핵심은 맹목적으로 소유자의 관심을 요함에 있었다.

 

눈길을 받지 못하면 금세 이골이 나고 마는 어린아이와 같다. 어떤 의미에서는 단어 그대로, 극도로 천진하다. 현상계 환상종이니만큼 그것의 행위를 욕망과 연관짓는 시도가 일체 무용할지는 몰라도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큼은 그러했다. 이는 종국에는 제 맹약자에 대한 각별한 관심으로 귀결된다.

 

그것은 모든 환각의 형태를 빌어 맹약자에게 말을 걸었다. 얇은 천이 마른 모래에 스치는 소리, 사막의 귀퉁이를 집어삼키는 모래 폭풍의 전조, 독니를 드러내고 쉭쉭대는 뱀의 비늘, 금붙이와 은화가 부딪혀 짤랑이는 마찰음, 찢어지도록 광소하는 여인의 비명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비극은 진의를 알 수 없는 망상이어야 할 그것을 맹약자만큼은 필연적으로 알아듣는다는 단순한 이치로 인해 발생했다.

 

그러나 요하난은 이제 맹약과 동시에 선물받은 광증에 가까운 기벽에 의연하다. 밤낮없는 소란이 아주 당연한 것으로 자리잡은 탓이다. 그는 도무지 막을 수 없는 헛된 광상을 나아가 불가해의 창구로 삼기로 한다. 눈과 귀조차도 끝내는 모두 헛되었다면 길을 선도하는 것은 다름아닌 영혼 그 자체여야만 했다. 환난을 실체로 뒤집는다. 두려워할 것 없다. 세계를 잊는다…….

실로미트의 창세, 요하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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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순간

솔직하게 말하자―요하난은 도망쳤다. 28살까지의 일이다.

 

제아무리 선도자인 체해도 끝내 칠정육욕을 지닌 청년이었던 것이 그 까닭이다. 장장 10년을 유랑했다. 때때로 한 곳에 머물렀으며 예견한 대로 약조를 이루었다. 종종 지나던 길에 맞닥뜨린 불우를 외면하지 못하고 도움의 손길을 건네기는 했으나 그뿐이다. 징집에 응하는 일 없었고 무역에 손 뻗지 않았다. 사방이 전란으로 들끓어 세상이 그를 필요로 하는데 감히 범인의 삶을 탐냈다.

 

주박에 답할 시간은 충분히 주어졌는데도 시간을 끌어서일까. 환각은 날이 갈수록 그를 채근하듯 점차 강해졌다. 환청과 환시 따위에 괴로워하던 어린 날의 제 스스로가 우습게 보일 정도였다. 지닌 자에게 끔찍한 불행을 가져다 준다는 저주받은 보석의 악명을 만만히 보았던 것이 그의 실책일지도 몰랐다. 도망친지 여덟 해쯤 흘렀을 무렵에는 차라리 꼭 죽어버리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요하난은 그렇게 스물여덟이 되었다. 실은,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남방의 사막 한가운데 있었다. 제 스스로 기억하는 한 그가 마지막까지 머물렀던 곳은 아그립냐조차 아니었다. 진실로 정신이 나갔구나. 황야에서 한참을 허탈하게 웃어대다 그는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고자 발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고 했다.

 

우연찮게 황야에서 길 잃은 상인을 발견하지만 않았어도 요하난은 그대로 돌아갔으리라. 사막을 횡단하는 캐러밴은 미아 꼴이 되는 일이 극히 적었으나, 모래 폭풍에 휩쓸려 길잡이를 놓친 얼뜨기만 남겨졌다면 이야기는 달랐다. 그는 낙오자들을 좌시하지 못했으므로 얼간이를 이끌고 도성의 정문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불운하기 짝이 없게도, 하필 그 날 지옥의 문이 열렸다.

 

그래서 선택했다. 더 미룰 수가 없었다. 태초에 얄팍한 선의로 영혼을 건넸듯 이번에도 또 그리 했다. 작열하는 불꽃과 유황의 악취 틈에서, 환청일지 생시일지 모를 찢어지는 비명 소리 속에서, 요하난은 딱 한 가지 살아날 길을 찾아낸다. 만일 지옥의 문이 스스로만 닫힐 수 있다면, 그렇다면, 사라진다 착각함에 사라짐과 다름 없으리라…….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그는 착란으로 외쳤다.

 

―눈을 감으니 비로소 보이고, 귀를 막으니 비로소 들리는구나!

―오늘에야 이 주박을 받아들이려 나 이 곳에 섰으니,

―열두째 주인이 그러했듯, 나도 미치게 되리라.

―나 역시 그렇게 되리라.

―그러므로……

 

모래 폭풍을 헤치고 돌아온 상인들은 저자에 두 얼뜨기의 죽음을 널리 전하였으나, 불꽃에 목부터 삼켜졌다는 어리석은 선도자는 사흘 후 얼간이를 대동하고 거짓말처럼 도성 앞에 나타났다. 그러고는, 성벽 안으로는 한 발짝도 들이지 않고, 도로 바람 들이치는 황야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는.

“이 곳에 우자 있으니, 내 목을 거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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