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밥 버러지 새끼. ”
- 진실을 말하자면 타인이 붙여준 이름은 아니다. 실질적으로 지금껏 너, 네놈, 꼬마 등으로 불렸다.
- 텐진은 불법의 수호자를 뜻한다. 저 스스로 명명되길 택한 단어 치고는 거만하다. 진상을 말하자면 한 승려의 것을 멋대로 빼앗아왔다. 본명이랄 게 따로 없다.
- 이름을 지어주고자 할 경우 사양치 않는다. 당장 그의 환상종만 해도 그를 마니라 부른다. 그가 자신에게 이름을 알려줄 때까지.
- 딱 한 번 제 어미가 저를 다와(월요일에 태어난 아이, 달이 뜰 때 태어난 아이)라고 부른 적이 있다.
- 때문에 한 해 중 밤이 가장 긴 날을 멋대로 생일이라 생각한다.
외관
“금수 같은 놈.”
- 입가를 손등으로 닦아내고 정면을 응시하는 눈은 퀭하고 또 집요하다. 번들대는 안광은 금방이라도 상대를 물어 뜯을 것만 같다. 아닌 게 아니라, 저 잘 갈린 송곳니를 보라. 인간의 본질이라 칭하기 어려울 법한 뾰족한 이빨의 형태는 그가 환상종의 영향을 받은 맹약자임을 드러낸다. 간신히 시선을 옮기면 얼굴의 반이 정리되지 못한 머리칼로 뒤덮인 꾀죄죄한 몰골을 마주할 수 있다. 그 안에서 타오르듯 두렵게 빛나는 샛노란 안광은 햇살로도 봄의 바람꽃으로도 비유하지 못할, 인간의 의양보다 짐승에 가깝다.
- 초원 북쪽을 유랑하는 유목민 출신으로, 독특하게 치렁거리는 천을 두른 방식은 승려의 복식에서 파생된 것이다. 소년의 부족은 정신적 스승인 라마를 중심으로 한 사상 종교로 뭉쳐있기에 부족에 소속된 이들은 모두 배움을 이룩하는 승려와 비슷하다.
- 유목민의 특성상 노끈과 장식, 독특한 매듭과 자수에 관심을 가진 이들로 인해 복식이 꾸며지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넓고 큰 천으로 목 바로 뒤 머리를 굵직하게 땋아 내려 어깨 앞에 늘어놓은 것은 어린 아이들이 주로 하고 다니는 부족의 전통이다. 신경을 썼구나 싶은 부분이라곤 고작 거기까지라는 게 사소한 흠이지만. 뒤에 늘어진 엉성한 머리는 부스스하고 제멋대로 잘려 정리되지 않고 사방으로 뻗쳤다. 그 뿐인가. 걸친 옷자락 끝은 실밥이 풀렸고, 사슴의 가죽으로 만든 모카신은 낡고 헤져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갈 것만 같다.
- 관리 받지 못한 외관은 방임의 결과물인가 싶기도 하다. 틀린 소린 아니다. 그는 고아가 아님과 동시에 고아나 진배 없었다. 제 부모 알아보지도 못하는 금수 새끼. 탄식과 욕설은 꼬리표처럼 그를 따라다녔으나 텐진 은 신경쓰지 않았다…
성격
少年
사내 아이 · 다 자라지 않은 아이
“돈 좀 있냐?”
못돼처먹고 | 길들여지지 않은 | 짐승 새끼
- 출가를 한 10대 소년 소녀들은 사미와 사미니가 되어 십계를 받아들이는데, 이 십계는 다음과 같다.
- 살아있는 것을 죽이지 말라. 훔치지 말라. 음행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술 마시지 말라. 향유(香油)를 바르거나 머리를 꾸미지 말라.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보지도 듣지도 말라. 높고 넓은 큰 평상에 앉지 말라. 때가 아니면 먹지 말라. 금은 보화를 지니지 말라.
- 그로 말할 것 같으면 이 모든 걸 어겼고, 어길 것이고, 어기고도 남았다.
- 제 부모도 못 알아보는 금수 새끼! 죄와 업의 무게도 알지 못하는 버러지 놈. 공양도 예불도 예경도 행한 바 없고 부족의 법칙을 밥 대신 씹어먹으며 남에게 피해 주기를 거리끼지 않으니 만인이 입을 모아 그를 비난하는 건 당연도 하다.
“금품 갈취라니? 적선 하고 선행 쌓으시라 이겁니다~.”
깡패 | 양아치 | 좋게 말하면 악동
-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은 지 하는 게 뭔지는 알까. 지나가는 사미의 길을 막고 주머니를 털질 않나, 남이 둔 공양물을 슬쩍하질 않나. 툭 하면 싸움이 붙어 주먹질을 하고 허드렛일이라도 시키면 그 날로 모습을 감춘다.
- 그러곤 도덕적 잣대도 율법의 수행도 남에게는 요구하니 이 무슨 날강도란 말인가? 달성한 이는 소년이 아직 어려 짓궂은 짓을 부러 행하는 것이니 이해하고 기다리면 때가 오리라 하였으나 당장 곁에 선 자들은 입을 모아 저 놈을 짐승떼 사이에 던져 호되게 혼내야 합니다, 했다.
“나? 나는 뭐, 삼악취에나 떨어지겠지. 으레 다른 놈들이 말하듯…”
내제된 분노 | 악바리 | 성장하지 않는
- 거리낄 것 부재한 양 멋대로 사는 주제에 속 없이 사느냐면 그건 또 아니다. 간혹 사람이 답잖게 구노라면 이를 의뭉스럽다 일컫을 텐데 텐진은 달랐다. 의심이 들기에는 확고했고 태도라 하기에는 갑작스러웠다. 평이한 문장으로 다듬어 내기보다 이를 악물고 한 자 한 자 발음하는, 순간 눈이 타오르듯 빛나는 그것.
- 그건 분노였다.
- 그랬다. 그는 만인을 적대하는 듯했다. 경계심 따위 키우지 않는다고 제멋대로 선을 드나들게끔 유도하는 주제에 불 붙으면 끝까지 타올랐다. 땅을 두 주먹에 피가 날 때까지 내려치고 영문 모를 욕설을 입에 담았다. 무엇이 그에게 증오를 심었는진 파악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 감정은 사람을 갉아먹고 자라지 못하게 만든다.
- 그러나 그는 스스로 성장하지 않기를 택했다.
해악 될 마음을 삼키고 평생을 소년으로 남아있겠다고.
드루이드
- 신체의 일부가 변화할 때 늑대의 양상을 띤다. 노랗게 빛나는 한쪽 눈과 유달리 뾰족한 편에 속하는 이빨부터 시작해 이 모든 의태는 지극히 당연하게도 제 환상종에게서 물려 받았다.
- 그는 드루이디즘에 밀접한 오바테의 형태에 더 가깝다. 그의 해학은 윤회와 내세, 피안에 맞닿아 있다. 생명과 시간의 문을 배워 죽음과 삶의 사제가 된 이는 나무로부터 약초학을, 의학을 배운다.
기타
내일과 내생(來生)중 어느 것이 먼저 찾아올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丹
쵸텐족
- 발 닿는 곳이 십지를 수행할 터전이다. 그들 부족은 신사이자 예배 장소를 뜻하는 쵸텐(사리탑)으로 저들이 묶여 불리길 원했다.
- 인원은 칠십을 넘긴다. 소수의 사람들은 출가를 택해 승려가 되고 나머지 인원은 평범히 부족원으로 구성되는데, 대다수가 공통적으로 라마교에 몸을 담는다. 출가한 이들은 단순한 옷자락을 엮어 입고 기름지고 단 음식을 멀리 하며 필요한 만큼의 재산만을 보유한다. 이는 부족 전체의 분위기로 자리해 쵸텐족은 자급자족 이외 물질적으로 더 욕심내는 법이 적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검소함을 소양 삼는다.
- 소와 염소를 키우며 육식보단 채식을 즐긴다. 계절을 따라 목축지를 바꾸어 돌랄을 유랑하는 형태는 초원의 민족의 타 유목민들과 다를 바가 없다. 승려를 제하고는 대부분 교리에 본격적으로 몸 담기보단 라마를 공경하고 공양물을 바쳐 귀룡으로 인한 인간의 안녕을 비는 정도에 그친다. 때문에 속세의 화려함과 재물을 탐내지 않는 십계를 수행하는 이가 아니라면 짚단을 꼬고 생선과 소, 사슴의 가죽을 다루는 솜씨와 구슬을 엮은 장신구, 천에 수를 놓은 부적 등을 만드는 일이 발달되었다. 환상종에 대항하기 위한 기본 전투력을 보유함도 마찬가지다.
- 부족장은 라마(스승)라 불리며, 가장 큰 깨달음을 얻은 이다. 라마의 자리는 종교적 지도자와 비슷한데, 보통 스승의 제자에서 제자로 대물림되어가는 형식이다. 족장직이 혈연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독특한 방식이기도 하다.
죄인
- 보리심과 지혜를 중시해 해탈의 길을 걷고자 하는 쵸텐족 특성상 마땅히 화 내야 할 일에만 화를 내는 것이 보편적이다. 허나 그들이 공통되게 결코 용납치 못하고 죄인이라 낙인 찍는 경우는 다음과 같은 법도를 어기는 데에 있다.
- 하나, 라마의 자리를 폭력으로 갈취하지 말 것. 권력을 힘으로 빼앗지 말 것. 탐내지 말 것. 둘, 살인하지 말 것.
- 라마교와 비슷한 교리를 수행하는 부족은 돌랄 지역 어디에든 존재하나 그들과 쵸텐족의 차이점을 이르라면 쵸텐족은 전생의 죄를 넘어 선대의 죄가 자식에게도 이어진다 믿는 쪽에 있다. 요는 제 업이 대물림 되지 않게끔 매사 마음가짐과 행동거지를 바르게 하라는 것이나 결과적으로 부모가 잘못을 저지르면 자식까지 업을 청산해야 하는 의무가 주어지고 만다.
- 텐진의 아비는 저 둘을 모두 어겼다.
- 이가 텐진이 죄인의 자식이라 불리어 내세를 위해 바로 그 업 청산을 이유로 백정과 같은 위치에 놓인 이유였다.
죄罪
- 아버지는 라마의 제자 중 하나이자 대처승(결혼하여 아내와 자식을 둔 승려)이었다. 다음 대 라마라 불릴 만큼 영특하고 온화한 자로 익히 알려졌으나 큰 흠을 지녔으니 이는 권력욕이다. 감히 내려놔야 할 걸 탐낸 죄로 스승은 이를 알아보아 텐진의 아버지가 아닌 그의 친우를 다음 대 라마로 올리길 택했다.
- 텐진의 아버지는 당연히 이에 크게 상심하였고, 전대 라마와 말다툼 중 우발적으로 그를 절벽에서 밀어트렸다. 사고에 가까운 형태였으며 순간의 욱함이 원인이라지만 감히 부족의 스승을 해한 죄, 중사도에 이른 자가 시행할 것이 아니었다.
- 그는 부족에서 추방당해 이름을 잃었다. 남편이 살생을 저질렀음을 믿지 못하고 어미는 식음을 전폐하여 틀어박혔다. 텐진이 태어난 지 돌도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아이는 변변찮은 이름조차 주어지지 못한 채 승려들의 품에 떨어졌다.
- 아버지를 닮지 말아라. 선대의 업은 네게 다 지어졌으니 어머니에게 효도하고 지식 알기를 부지런히 행하며 인과응보가 주어지지 않게끔 배움을 이룩해라.
- 승려들이라면 모를까, 감히 라마를 죽인 자의 아이를 곱게 볼 부족원이 존재할 리가. 이는 가족 전체가 내쫓기고도 남을 대죄였다. 그러나 새로운 라마는 아이에게 어떤 잘못이 있겠느냐며 거두기를 택했다. 그럼에도 텐진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 이름이란 존재가 긍정될 때 생기는 것. 그를 긍정하고자 하는 이가 부재함을 뜻한다.
죄인의 자식
- 죄인의 자식은 속죄를 위해 매일 같이 승려와 동일한 기름 지지 않은 풀 만을 먹고, 이조차도 터무니 없이 적은 양에 그친다. 제 물건을 가지는 일이 불가하며 개인 자산 또한 이에 포함된다. 매일 부족 내를 순회해 각 부족원의 부탁을 열 개 이상 들어준다. 초원을 돌아 작물과 약초를 캐어 자기 전 공양한다.
- 그는 타인과 동일하게 천막 아래에서 잠드는 일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따로 주어진 게르는 실상 게르라기보단 옥살이할 장소에 가까웠다. 짚단으로 만들어진 형편 없는 잠자리 앞에는 혹여 그가 아버지가 행한 살생을 탐내기라도 할까, 나쁜 마음 먹을까 필히 감시자가 함께했다. 투명한 족쇄나 매한가지였다.
- 무슨 행동을 해도 제 아비 같은 놈이란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실수로 개미를 밟아 죽여도 과연 살인자의 자식, 이라 말했다. 소년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친정에 처박혀 자신의 얼굴도 안 보려 드는 어머니와 관계를 단절한 걸 천인공노할 불효라 하질 않나, 아버지 죄를 왜 내가 대신 사함 받아야 하느냐며 공물을 집어던지면 금수라 부른다.
- 많이 베풀어라. 계율을 지켜라. 내세에 좋은 세간에서 태어나야지 않겠느냐.
- *같았다. 내세고 자시고 간에… 지금이 그냥 개 같다. 다 거지 같다.
분노
- 만사가 싫다. 자신을 이 꼬라지로 만든 아버지도, 우울감에 빠져 자식을 버리다시피 한 어머니도. 선대의 죄가 저에게 업으로 물림 받지 않게끔 수행을 갈고 닦으라는 스승도, 제멋대로 굴 때마다 빗자루를 내려놓고 제게 삿대질 하는 부족원들도.
- 죄인은 아버지다. 죄를 지은 건 아버지인데 태어난 것 이상으로 한 게 없는 자신은 왜 죄수 취급 받으며 살아가야 한 단 말인가? 살인범의 마음이 이어졌을 지 모른다며 씻겨져 내릴 때까지 부족의 오만 잡일과 심부름을 도맡아 하루종일 몸 쉴 일 없어야 한다는 건 도대체 어째서인가?
- 아주 깊은 곳에 응어리진 감정은 한 번 박히니 도통 떨어져 나갈 생각을 않았다. 화는 울고 불며 악을 쓰는 형식으로 표출되지 않고 그 두 눈을 형형히 변하게 만들었다. 맞는 말이래도 듣기가 싫었다.
-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본 라마가 말했다. 얘야, 감정은 너를 속세에 묶어 결코 열반에 도달하지 못하게 만들 거란다.
- 상관 없어요. 남이사 죽든말든.
- 유황불에 달궈지든 말든.
增
소년,
- 교리를 외우고 이해하는 일은 애저녁에 때려쳤다. 관심도 없을 뿐더러 납득조차 안 갔다. 그놈의 열반, 열반. 그놈의 번뇌. 순간의 감정에 사로잡혀 완전해 매여버린 소년에게 깨달음 따위가 중요할 리 만무했다.
- 쵸텐족은 북쪽을 순회하여 산을 타는 자들이었으나 간혹 서쪽 바다에 가까이 다가가곤 했는데, 그럴 때면 소년은 자신이 사라져 사람들이 난리가 나건 말건간에 자갈 해변으로 향해 바위 위에서 한참이나 바다만 바라보았다.
- 여기서부터는 최근의 일이다. 그를 기어이 발견해낸, 저에게 유일하게 살갑게 대해주던 한 승려에게 물었다.
- 여기가 정말 속죄의 땅일까. 이곳을 나가면 난 평생을 죄인으로 살까. 난 아닐 것 같아. 이 땅을 벗어날 때 진정 깨달음이라는 걸 얻을 수 있을 것만 같아.
- 얘야, 네 아비가 무엇으로 인해 파국에 치닫았는지를 기억하거라.
- 배움을. 깨달음을. 지혜를. 해학을 아는 이가 우리의 위대한 스승으로 말미암을테니 너는 그저 알면. 앎을 추구하면 된다.
이름
- 교리를 파악하고 열반에 올라라. 여느 때와 같은 문장이 늘어졌다. 평소였다면 소년은 그대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 그를 등한시하여 사라졌을텐데, 그 날따라 유독 아이가 말을 잘 들었다.
- 너, 이름이 뭐였지.
- 텐진.
- 무슨 뜻이지.
- 불법의 수호자. 법을 집행하는 자.
- 그걸 나한테 줘.
- 이름은 줄 수 있는 게 아니란다.
- 그럼 내가 갈취해가지.
- 이름은 빼앗을 수 있는 게 아니란다.
- 아냐. 할 수 있어.
- 난 뭐든 할 수 있어.
텐진
- 애초에 그들이 먼저 자신에게 이름을 주었다면 그리 안하무인으로 나올 것도 없었을 텐데. 소년은 그저 제 못되어 처먹은 행동거지도 사람들이 혀를 차는 깡패짓도 원인이 죄 부족 사람들에게 있다 여겼다. 일찍이 나에게 그런 무게를 지게 만들지만 않았어도, 날 긍정하기만 했어도, 날… 나를…
- 라마는 그에게 용서하라 하였다. 남에게 자비를 베푸는 건 남을 위한 일이 아니라 너를 위한 일이다. 너 자신을 위해 너는 미워해선 안 된다. 그렇게 치면 저들도 자신도 마찬가지다. 쌍방 죽일듯이 서로를 노려보는 이 양상은 하나로 뭉칠 씨족도 부족도 아닌 대적자에 가깝다.
- 소년이 텐진이 된 날, 기어이 이름을 빼앗은 날. 12월 중순의 어느 날. 간만에 남쪽으로 내려와 부족이 터를 잡은 곳은 날이 유독 따뜻해 겨울 같지 않았다. 그들은 여느 때와 같이 공양을 하고 기도를 하고, 새 땅에 온 것을 기념해 가족은 저들끼리 수수한 만찬을 차렸다.
- 새벽, 갑자기 빛이 사라졌다. 달도 별도 소거된 시커먼 암전 속 짐승이 들숨과 날숨을 번갈아 뱉었다. 여느 때와 같이 그에게 있어 감옥이나 마찬가지인 게르 안에서, 소년은 괴물을 독대했다.
- 그 날 늑대의 눈을 받은 가족 없는 아이는 모든 공양물을 훔쳐 달아났다.
도주
- 비로소 십 삼 년 중 처음 부족의 영역에서 완전히 벗어나려 할 때 라마가 등뒤에서 저를 불렀다. 아이야. 텐진이에요. 이를 네 이름 삼기로 하였느냐. 네. 법전은 코빼기도 보지 않던 녀석이 어쩌다. 불법을 수행하라 귀에 딱지 앉게 들해서요. 받아들이기로 결심한게냐. 아뇨.
- 하지만 또 어떻게 될 지 모르죠. 내기 하실래요. 제가 다시 여기 돌아올 때 당신들은 날 여전히 죄인의 자식으로 볼까요.
- 바깥은 험준하다. 나는 너를 잃고싶지 않구나.
- 가진 적 없으세요.
- 미움이 네 안에 가득하구나.
- 원인에 발 딛고 계세요.
- 무엇이 될 셈이니?
- 강해질 거예요.
- 힘 얻으면 전부 해결될 것 같으니? 그리하여 영혼을 바쳤니?
- 몰라요. 하지만 아무도 날 무시하지 못하게 만들 거예요.
- 날 금수라 부른 모든 이들에게 보여줄 생각이에요. 과연 그들이 시킨 모든 속죄의 행위를 벗어 던졌을 때 내가 인과응보를 맞이할지 더 나은 자가 될지.
복수
- 요컨대 이 어린 소년은 자신에게 강제로 지인 업도 속죄도 모조리 무시하고 자신에게 지령 내린 부족원을 등진 채 가장 오만한 방식으로 진리를 독학하려 드는 것이다.
- 자신의 부족원들이 제 존재를 긍정치 않고 끝까지 무명으로 남기고자 하는 면전에 대고 그들이 틀렸음을 주장하려는 것이다.
- 당신들이 틀렸어. 난 죄인의 자식이나 잘못 따위 없어.
- 그 주장은 모조리 잘못 되었다는 걸 알려주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필코.
- 그들의 교리를 파악하되 전면 부정하겠다는 사상은 지식을 받아들이는 한계를 명확히 구축하고 말 터이나 텐진은 오로지 자신을 증명하겠단 생각에 일념했다.
오바테
- 그렇게 그는 죄인의 자식으로, 부족의 탈주자로, 천인공노할 업을 진 자로 맹약자가, 환상종의 친우가, 인류의 배신자가, 구원자가, 철학자-드루이드-가 된다.
- 거머쥔 힘은 월식과 달의 지혜이니 시간의 문 열기를 꾀한다. 드루이드의 하위 개념이 되기도 하고 독립적 위치가 되기도 하는 오바테는 영혼이 불멸해 순회를 거듭한다 믿으니 업을 청산하기를 강제로 일생의 목표 삼아 살아온 아이에게는 실로 익숙한 지식이다.
- 제 환상종이 선사한 눈은 나무의 지혜를 볼 자격을 안겼다. 나무는 죽음과 재생, 희생과 변화, 시간의 비밀을 가르쳤다. 그는 삶의 사제이자 죽음의 사제가 되기 위한 단계를 밟는다.
- 열반, 번뇌, 삼사도, 보리도차제, 해탈의 길…
丹增
- 우리는 땅의 자식이다. 대지 위에 발 딛는 한 너에게는 얼마든지 기회가 있다. 땅에 새겨진 지식 읽는 법을 우리는 가르쳤고, 명상을 통해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길을 우리는 알렸다.
- 가야한다면 눈앞에 무엇이 있는지를 파악하거라. 너 배움을 등한시 하는 척 하면서도 새벽 되면 필요한 책만 가져가 글자를 손으로 더듬던 걸 안다.
- 유루법과 무루법을 되새겨라. 피안에 도달하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삼아라. 깨달아라, 깨달으면…
드루이드
- 너는 무엇이 되든 자연의 법초로 자리하리라.
그는 그렇게 북으로 향했다. 북으로, 더 북으로.
약속의 땅이 있을 곳으로.
하티 흐로드비트니손
달을 삼키기 위해 하늘을 달리는 괴물 늑대.
이명은 달사냥개로, 하티라는 이름의 뜻은 대적자, 증오하는 자다. 그는 제 형제와 함께 암흑천지를 불러오는 주체이자 원인이다. 동시에 월식의 신이기도 하다.
하티 흐로드비트니손의 등장은 언제나 어둠이 들이닥치는 것으로 예고된다. 주 출몰 시기는 해가 지는 저녁 8시부터 새벽 3시 사이. 만일 달빛이 갑작스레 사라진다면 하티가 곧 고개를 들이밀 것이란 뜻이 된다. 빛을 받으면 표면이 은색으로 변하는 털은 윤기가 흐른다. 몸 길이가 4m에 육박하는 거구를 지녔는데, 여기에서 늑대답잖게 갈기가 풍부해 덩치를 배로 불린다.
거대한 앞발과 주둥이, 강철 같은 이빨을 기점으로 등장과 동시에 전 생명체의 시야를 차단하여 암순응과 불빛이 생겨나기 직전 보이는 걸 모조리 집어삼켜 학살하는 것이 주특기다. 그러다 어둠이 걷히고 달이 뜨면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다시 하늘을 향해 날아 오른다.
성질
기본적으로 말보다 몸짓이 먼저다. 행동거지는 딱 늑대의 습성을 그대로 빼다 박았다. 늑대의 모습을 한 거인이 본질인지라 대화가 안 통하는 건 정말이지 결코 아닌데, 구사하는 문장은 지극히 짧고 생각 이전 태도가 우선 보이는 걸로 판단하건대 그저 지나치게 담백하고 귀찮음을 타고난 성격이 원인인 듯하다.
습성이 인간에게 적대적인 것은 아니다. 사실 등장 이후 눈에 띄는 생명체를 가리지 않고 입에 담은 건 달을 삼키고자 하는 본능에서 파생된 행실이다. 결과적으로 인간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으니 짐승 괴물이라 불리기에는 퍽 적합하다. 딱히 자신이 만든 피해와 죽음의 양상에 어떠한 추모도 죄책감도 느끼는 바도 없어 보인다.
함께 지낸 지 시간이 좀 지난 지금, 텐진은 제 환상종을 ‘개’라고 축약해 부른다. 간혹 앞에 ‘바보’가 붙을 때도 있다. 멸칭으로 받아들이기 충분한데도 이 또한 반응이 묵묵하다.
제 맹약자에게 친밀하게 구는 바를 마주하긴 쉽지 않다. 허나 코로 툭툭 두드려 주위를 끄는 짓은 영락 없는 개에 가까워 어쩌다 이를 목격한 이는 텐진의 정성이라곤 코빼기도 찾아보기 어려운 호칭 ‘개’를 납득한다.
달 이외의 것에 관심이 부재하다. 어떤 감정도 딱히 있어 뵈지 않는다. 당최 무엇을 통해 텐진의 영혼을 받아들였는지 가늠하기 어려운 일이다. 텐진 또한 여전히 약속의 성사를 이해하지 못했다. 허나 이유를 캐물어봤자 그 큰 눈을 끔벅이다 앞발로 제 맹약자의 얼굴을 밀어내기 일쑤이니 지금으로선 현재를 받아들이는 것 이외 도리가 없다.
월식의 신이라는 특징을 기반으로 늑대의 두 눈은 하늘을 관측하고 늑대의 육은 대지와 맞닿는다. 하티의 맹약자는 그의 모습을 띰과 동시에 달을 이해하며 천지의 흐름을 답습한다. 그는 십지를 이행하는 곳에서 태어난 영혼으로 순리의 흐름을 받아들이진 못할 망정 이행할 줄을 안다.
하티 흐로드비트니손의 핵심 성질은 윤회. 오바테에 가까운 진리를 안고 달의 흐름을 따른 시간의 이치를 거머쥔 새로운 철학자는 생명의 부활에 손을 대고 가장 두려운 지혜를 순응한다.
약속의 계기
남쪽에 부족이 자리를 잡고 밤이 깊은 날이었다. 게르마다 밥 짓는 냄새가 진동했는데, 이가 사그라들고 아이는 부모의 품에서 안락히 잠 들던 시간이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에게는 감옥이나 마찬가지인 게르에 감시자를 대행해 소년이 들어간 차였다.
초원에서 환상종을 맞닥뜨리는 일은 새롭지도 못하다. 환상종이 떼거지로 나타나지 않으며 물질적, 영적 대응이 가능하다면 부족원은 환상종을 발견하는 즉시 종을 울려 만인에게 전투를 준비하라 알린다. 그러나 그 날은 달랐다. 긴 평화에 안주하여 부족의 분위기가 느슨해진 틈을 타 암흑이 천지를 뒤덮었다.
어둠에서 소 울음 소리가 몇 번 울리다 끊겼고, 인간 비명 소리가 몇 번 울리다 끊겼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불 피울 겨를도 없었다. 당황하는 사람들 틈에서 소년은 감시자의 인기척이 사라짐을 깨달았다. 어둠에 눈이 적응할 때까지 바닥을 더듬어 기어가던 차, 그는 거대한 무언가를 직시했다.
비단 두려웠기에 순간 얼어붙은 게 아니었다. 짐승이 숨 내뱉는 게 여기까지 끼쳤다. 염소가 울며 달아났고 이변을 감지한 승려들이 법당에서 뛰쳐나왔다. 별빛마저 모두 사라져 시커매진 하늘. 갑자기 끼친 암전 속에서 사람들이 불을 찾고 무기를 쥐려 했을 때에.
텐진은 다급하고도 간절하게 그 앞에 대고 외쳤다. 바다를 보고 난 이후여서 그랬다. 이름을 빼앗은 날이어서 그랬다. 도주에 대한 욕망이 극에 달한 순간이어서 그랬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지금이 기회인 것 같았다.
너,
나를 데려가라.
짐승은 어디서 났는지 모를 소 한 마리를 물고 두 입에 씹어 삼켰다. 울음소리가 긴히 퍼질 새도 없었다. 굵직하고 끈적한 것이 후두둑 떨어져 피 웅덩이가 고였다. 뺨에 튀었다. 뜨끈했다. 개의치 않았다.
다음은 자신이 될 것이다. 인파가 모인 곳을 정확히 겨냥한 늑대의 눈이 굴러 제쪽에 향했다. 달은 여전히 없었다. 그는 언어로 영혼을 그에게 건넸다. 이판사판이었다. 생사가 오가는 침묵이 이어졌다. 몇 십 초였는지, 혹여 몇 분이었는지 모를 시간의 흐름이었다. 식은 땀이 철철 났다. 그 때에 머릿속에 음성이 울려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