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아니, 에실라는 널 해치지 않아. 약속할게……. ”
에실라는 바르질라, 그 중에서도 상업이 발달한 구역에서 나고 자랐다. 사람들이 이리저리 뒤엉켜 물건을 사고파는 목소리를 높이는 곳, 그곳이 바로 카림 가족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외관
모래를 닮은 옅은 금빛 머리카락, 선인장에 핀 꽃과 같은 분홍빛 눈. 그는 사막의 색을 닮았다.
다만 저 쭈뼛거리는 태도 하며, 늘 구부정하게 굽히고 다니는 등은 당당하고 광활하게 퍼져 있는 사막과는 전혀 닮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곤 했다.
머리카락은 스스로 관리할 줄 몰라 긴 여행 전 아예 짧게 쳐 버렸으며, 입고 있는 옷은 투박한 여행복으로 보이지만 상당히 고급 옷감을 써 정성껏 만든 옷이다.
또래에 비해서도 키가 꽤 작고 가벼운 체구에 근육 적고 얇은 팔다리는 아이가 운동과는 그리 연이 없음을 나타낸다. 그래도 혈색만은 아주 좋지만, 미처 지워지지 않은 병색의 흔적이 남아 있다.
늘 옷가지로 가려 두지만, 옷 사이로 뒷목에 돋은 일곱 개의 옅은 금색 뱀 비늘이 언뜻 보이곤 한다.
성격
겁 많은 / 억눌린―비관적인 / 사려깊은 / 강단 있는
에실라는 두려움이 많았다. 이 두려움에는 여러 원인이 있었다. 태어나서 대부분의 세월을 가족들의 옷자락 아래에서 지내느라 그 밖의 세상을 잘 모른다는 것, 유달리 허약한 몸, 그리고 제 모든 조건 탓에 아무것도 되지 못할 것이라는 비관. 그 모든 것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가 흐늘거리는 발을 내딛지 못하도록 한 줌 모래로서 그의 발을 파묻었다.
그래서 에실라의 마음에는 무언가 쌓인 것이 많았다. 이를테면― 자신만 밖에서 활동하지 못한다는 불만, 알게 모르게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분노, 그 외 집안에서만 애지중지 길러지는 것과 자유를 갈구하도록 타고난 성향이 충돌하여 생긴 좋지 않은 감정들. 에실라는 그것들을 잘 참는 편이었다. 인내력이 좋은 편이기도 했고, 비록 제 마음에는 들지 않지만 가족들이 그를 걱정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이런 감정들은 미약하게나마 그의 성격에 영향을 끼쳤다. 에실라는 동정을 불쾌해하며, 보호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건 제 상황을 조금도 나아지게 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아이는 상대방에게 선의를 베풀 줄 안다. 사람이 사람에게 선하게 구는 것을 보고 자랐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는 작고 병든 아이여서, 뭇 어른들은 그에게 더욱 친근하고 순하게 대하곤 했다. 가족들이 일부러 그런 어른들만 아이에게 접근시키기도 했고. 그러니 에실라가 사람의 악의보다는 선의에 익숙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노출된 적이 없으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에실라는 선의에 따라 행해지는 저를 향한 배려에 불쾌함을 느끼는 것을 죄스러워한다. 그래서 타인에게 친절히 대함으로써 죄악감을 해소하려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유약해 보이는 인상과는 다르게, 에실라는 자신이 한 번 결정한 일에는 거리낌이 없는 편이다. 물론 한 번 결정을 하기까지 많은 번뇌와 고민의 언덕을 올라야 하긴 하지만. 한 번 시작한 일은 관두는 법이 적고, 자의로든 타의로든 일을 맡게 되면 최선을 다한다.
이러한 성정은 모든 ‘에실라’의 공통점이지만, 개체별로 약간의 차이가 존재한다.
이를테면 첫 번째 에실라의 경우 은근히 짜증이 많은 편이고, 세 번째 에실라는 낙관적이며 여섯 번째 에실라는 부끄러움이 많아 사람들 앞에 잘 나서지 않는 식이다.
드루이드
능력을 사용할 때면 몸에 뱀 비늘이 돋고, 기다랗게 자라난 송곳니에서 독을 뚝뚝 흘린다. 눈동자 또한 가운데가 길게 갈라지니, 영락없는 뱀의 모습이다.
기타
카림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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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질라에서 치료약을 만들거나 재료를 사려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 보았을 이름, 카림. 작은 약재상에서 시작한 카림 가족은 아그립냐 전체에서 알아 주는 커다란 약재상 가족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다. 가족의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약재와 함께하며 자라 약학이나 의술에 관심을 두는 경우가 많았고, 카림의 이름을 내건 치료소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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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만나 본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참으로 호탕한 사람들이로군!” 그 말대로 카림 가족은 대체로 덩치가 크고 성격이 쾌활했다. 여섯 번째 아이로부터 한참 간격을 두고 태어난 막내아이를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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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실라 파리하 카림! 그 아이는 태어날 적부터 작고 약했다. 걸음은 늘 비틀거렸고, 쉽게 병드는 몸은 날이 조금만 차도 밭은 기침을 내뱉곤 했다. 당연히 가족들은 이 약한 아이를 애지중지 감쌌다. 약재를 태워 그 연기를 방에 쐬고, 매일 푹신한 새 이불을 깔아 주었다. 그럼에도 약하게 태어난 몸은 쉽사리 낫질 못하고 더욱 약해져만 갔다. 의사들은 입을 모아 아이가 보통 사람만큼 오래 살 수 없을 거라 말했고, 에실라 자신을 포함한 모두가 그 말을 의심 없이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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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쓰는 일은 당연히 할 수 없었다. 약학에는 큰 재능이 있었으나 그나마도 약재에 오래 노출되면 앓아눕는 경우가 많아 직업으로 삼기도 애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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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연적으로 찾아올 죽음 이전에 하고 싶은 것을 조금이라도 더 하고 싶었다. 그 중 가장 갈구했던 것은 배움이었다. 에실라는 건강상 학교에 가지는 못했으나, 집안에서 선생을 고용해 교육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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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전적으로는 여유로웠으나, 에실라의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에실라는 우리가 끝까지 돌볼 수 있어, 따위의 말은 오히려 독이었다. 보호하려는 마음의 기반은 분명 선의였으나 그 방식은 에실라에게 맞지 않았다. 아이는 자신이 늘 그 무엇도 되지 못하고 영원히 보호받아야 할 천덕꾸러기―가족들은 물론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 취급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못내 불만스러웠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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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에실라가 바라는 것은 한 가지였다. 내가 해낼 수 있는 인간임을 인정받는 것, 즉 효능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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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무엇을? 무엇을 해낸단 말인가?
“하지만 어머니, 저 또한 사막의 아이예요. 이 땅 위에 태어나 제 안에 모래가 가득한데, 어찌 저를 그 위에 세우지 않으십니까? 왜 모래 위에서 태어난 제가 모래로 돌아갈 자유조차 허락지 않으시나요?”
“그러나 얘야, 나는 자식을 잃고 싶지 않아…….”
‘그러면 저는 이대로 연명만 해야 하나요?’ 라는 말은 결코 할 수 없었다. 그만큼 모질지는 못했다.
아홉 개의 머리 / 일곱 명의 ‘에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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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에실라에게는 변화가 찾아왔다. 아홉 개의 머리가 그를 바라보며 말을 건네던 순간 아이는 제 몸이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히드라의 재생력을 조금이나마 얻게 된 것이다. 워낙 원래 몸이 허약해 여전히 보통 사람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적어도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는 아니게 되었다. 에실라는 그것만으로도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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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그만큼 안 좋은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마치 히드라의 머리처럼, 에실라의 안에서 무언가 다른 존재가 자라났다. 자신도 ‘에실라’라 주장하는, 여섯 개의 다른 인격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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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여섯 명은 첫 번째 에실라에 비해 확실히 자아가 옅은 편이었다. 너와 나의 구분은 하지만 별개의 이름 없이 자기 자신을 당연히 에실라라고 칭하는, 그럼에도 누구 한 명이 진정한 ‘에실라’라고 구분하려 들지 않는……이질적인 인격들. 그들은 에실라가 맹약자가 된 이후로 한 명씩 서서히 불어나, 현재는 첫 번째 에실라를 포함해 일곱 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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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에실라와 다른 에실라들을 구분하는 법은 간단하다. 첫 번째 에실라는 자기 자신을 구별하기 위해 스스로를 ‘에실라’라고 부른다. 그러나 나머지 에실라들은 자기 자신을 ‘나’나 ‘에실라’ 대신 ‘우리’라고 부른다. 각 개체는 첫 번째 에실라와 기본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으나 개체별로 미미한 성격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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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기본적인 주권은 첫 번째 에실라가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에실라는 첫 번째 에실라로서 존재하지만, 간혹 다른 인격들이 잠깐씩 튀어나와 돌발행동을 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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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약 이후 한 가지 더 다른 점이 생겼다면, 에실라 자신의 피에 미약한 독성이 생겼다는 점. 타인이 접촉하거나 섭취했을 때 심하지 않은 두통과 현기증을 일으킨다. 따라서 에실라는 최대한 피를 흘리지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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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유리병이 가득 든 작은 주머니를 들고 다닌다. 유리병 안에는 그가 히드라의 모습을 빌려 채취한 독을 정제한 약이 들어 있다. 맹약자가 된 이후로 정제 방식을 연구했으며, 항상 이를 가지고 다니며 치료 보조 용도로 사용한다.
카림의 맹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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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약자가 되어 누구의 도움 없이 당당하게 걸어 돌아온 막내를 본 가족들의 반응은 대체로 놀라움에 가까웠다. 물론 그의 곁에 있는, 사람 하나 정도는 가볍게 삼켜 버릴 듯한 머리 아홉 달린 뱀 때문에 놀라기도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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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환상종도, 어린아이가 받을 질타도 두려웠다. 그럼에도 가족들은 섣불리 아이에게 무어라 할 수 없었다. 에실라는 ‘드디어 나도 무언가 할 수 있다’는 고양감에 벅차 그의 짧은 생 중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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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가족들은 그들의 가장 어린 딸이 가나안으로 향하는 것도 말릴 수 없었다. 다만 자신들이 아이를 대하는 방식이 부족했던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히드라
여러 개의 머리를 가진 뱀.
개체마다 머리의 숫자는 다르지만 머리 한 개를 자르면 그 자리에서 두 개가 돋아나고, 시간이 지나면 또 새 머리가 돋기 때문에 오래 산 개체일수록 머리 개수가 많다. 머리가 자라나는 것 자체는 재생할 힘이 있다면 계속할 수 있다. 그러나 머리의 개수가 너무 많아지면 신체 유지에 필요한 열량이 지나치게 커지며, 움직임 또한 굼떠져 사냥을 제대로 하지 못해 생존에 극히 불리하다. 평균적으로는 머리 100개 전후로 생을 마감한다. 모래 위로 출몰하는 것은 주로 낮으로, 밤에는 모래 아래로 파고들어 여러 개의 머리로 먹이를 찾곤 한다. 서식지에 따라 빛깔이 다르지만 아그립냐 주변에 서식하는 것들은 모래의 색을 닮은 연한 금빛을 띠는 경우가 많다.
에실라와 함께하는 히드라는 모래색에 머리가 아홉 개인 개체이다.
머리가 계속 자라날 만큼 재생력이 좋아 웬만한 상처에는 끄떡도 하지 않으며 강력한 독을 지니고 있어 사냥에도 능하다. 히드라의 독은 치사율도 높지만, 접촉하거나 섭취할 시 온몸이 불타는 듯한 고통을 느낀다. 히드라가 사냥한 사냥감은 전신에 독이 퍼져 있기 때문에 다른 생물들이 피하곤 한다.
히드라의 맹약자는 히드라의 모습을 빌려 그 독으로 공격하거나 히드라의 재생력을 일시적으로 타인에게 넘겨 치료할 수 있다.
성질
타고난 사냥꾼. 독립적인 성격이지만 한 번 마음을 연 대상에게는 퍽 다정하게 군다. 흥미를 돋우는 것에 앞뒤 안 가리고 뛰어들려는 성향이 있으며, 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좋아한다.
머리마다 성격이 조금씩 다르며, 머리들끼리 대화하고 심지어는 싸우기도 한다. 각 머리의 차이가 에실라보다는 뚜렷한 편이다. 하지만 대체로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단순한 편이다.
인간을 사냥하는 것은 꽤 즐긴다. 물어보면 변수가 많아 재미가 있다……고 설명한다.
기본적으로는 에실라에게 친근하게 구는 편이다. 제 머리를 에실라에게 비벼대는 것은 물론이요, 쓰다듬어 주는 것을 즐기기까지 한다. 오히려 에실라가 부담스러워할 만큼.
제 맹약자를 이리 친근하게 대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네가 말했지 않니, 살고 싶다고!”
“그런데 그게 내게 머리를 비비는 것과는 상관 없잖아!”
약속의 계기
에실라가 처음으로 완강하게 ‘이것만은 포기할 수 없다’고 버틴 것은 열두 살 때였다. 그에겐 다시 없을 기회였다. 그는 바르질라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으로 향하는 상행에 따라가겠다고 버텼다. 가족들은 골머리가 썩을 지경이었다. 건강한 아이라면 모를까, 혼자서는 집 밖에 나가지도 못하는 아이를 함부로 모래바람 앞에 내보냈다가는 상행 도중에 상을 치르게 될 수도 있으니 말이었다. 그럼에도 에실라의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제발요. 저는 제가 살아 있다는 것을, 무언가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요…….”
그렇게까지 말하니 어떻게 말릴 수 있겠는가. 목숨보다도 중요하다는 절박함이 그 눈에 비치자 가족들은 그만 허락하고 말았다. 대신 상비약과 옷 등 그를 지켜 줄 물품과 형제 중 그나마 손이 비는 한 명을 딸려 보내는 조건으로.
하지만 상행을 떠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일이 터지고 말았다. 상단이 잠깐 휴식을 취하기로 한 곳이 하필이면 히드라가 자고 있는 모래 위였고, 움직임을 감지한 히드라가 모래 밖으로 튀어나와 사냥을 하려 들었다. 순식간에 상단은 아비규환이 되었지만, 히드라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도망치도록 일부러 기다리고 있었다. 어차피 다 먹어 버릴 예정이지만, 무릇 추격이라는 건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진 뒤에 시작하는 것이 짜릿하지 않은가.
하지만 모두가 히드라의 반대쪽으로 도망칠 때, 히드라를 향해 달려 가는 조그만 인영이 있었다. 바로 에실라였다. 제대로 움직이지 않고 갓 태어난 동물처럼 바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생애 처음으로 달음박질을 하는 에실라가 모래바람 속에 있었다. 형제가 뒤늦게 에실라를 발견했지만 에실라는 이미 히드라의 코앞까지 달려간 뒤였다.
에실라는 히드라의 앞에 섰다. 잡아먹힐 것을 예감해서인지, 아니면 고양감인지. 심장은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거세게 맥동했다. 에실라 스스로도 충동적인 결정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일을 무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책에서 읽고 다른 이들의 말로 들어왔던 맹약이 떠올랐다. 만약, 히드라가 저와 맹약한다면……. 분명, 강한 힘을 얻게 될 터였다. 맹약자는 좋은 취급을 받지 못한다지만 그래도 좋았다. 적어도 맹약자는 환상종의 힘을 부릴 수 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에실라는 벅차게 행복할 것이었다. 설령 죽게 된다 한들, 예정된 끝이 아주 약간 빠르게 찾아오는 것뿐이었다.
히드라는 작고 살점이 적어 맛없어 보이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두려움에 몸을 떨면서도 도망가지 않고 제게 다가선 것을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내며 바라봤다. 바로 입에 넣지 않는 것은 조금의 당혹감과 일말의 흥미 때문이었다. 송곳니에서 독이 뚝뚝 떨어졌다.
에실라는 곧 외쳤다. 온 마음을 담아, 목이 터질 만큼 강하게.
“난 살고 싶어, 뭐든 내 마음대로 행하고 싶어! 그러니 나를 네 머리로 삼아 줘!”
그러자 히드라는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가, 목을 숙여 에실라를 빤히 쳐다보며 잠시 생각하더니 몸을 떨고 웃는 듯한 동작을 취하며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