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 듣긴 했습니다? ”
외관
─ 녹음과 붉음이 서린 탁한 머리칼은 부산스럽게 뻗쳐 제대로 관리했다는 느낌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나마 보는 기준 오른쪽 머리를 굵게 땋아 뒤에서 끈으로 정리했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그야말로 산발 그 자체였을지도 모르겠다. 짧은 머리 아래로는 풍성한 깃털 장식을 달고 다녔다. 무슨 깃털이냐고 물으면 독수리의 어린 깃털이라고 말하며 웃었다.
─ 자안의 시선은 항상 보기 좋게 굽어져 있었지만, 빛을 받으면 푸른 빛깔이 여실히 드러났다. 맑은 색. 보는 사람은 단연 맑다고 말했다. 피부는 또 어떻던가. 이 또한 밝다. 잔 상처가 있지만, 없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유랑하는 사람에게는 명예로운, 일상인 상처일 뿐이다.
─ 겹겹이 껴입은 천 옷은 유목민의 특징이다. 천마다 작게, 혹은 크게 나 있는 색색의 자수들은 그의 출신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 간혹 금속 장식을 달아둔 탓에 짤랑이며 흔들리는 소리가 컸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면 다들 유목민이구나, 하고 말할 복장이기도 했지.
─ 그래도 겹겹이 입은 옷 안쪽으로는 단촐하기 짝이 없는 복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언제 기온이 떨어질지 모르고, 햇볕을 계속 받아야 하는 게 유목민이니 별 수 있으랴. 가리는 게 일상이고, 품이 넓게 입는 것도 일상이다.
─ 가려진 손목과 발목 안쪽. 목 안쪽에는 태양과 땅을 뜻하는 타투가 새겨져 있다. 유목민이라면 한 번쯤 새길 법한 흔적이었다. 본인도 그게 썩 마음에 드는지, 팔뚝 쪽에도 늘릴까 고민 중이더랬다.
성격
나른한 배덕자 ㅣ 자연의 흐름 ㅣ 나, 그리고 너, 마지막으로 우리 ㅣ 찬미 ㅣ 넉살 좋은
탁 트인 초원의 흙 먼지. 흩날리는 잔풀. 아득할 정도로 넓은 평원.
그 모든 곳에 그가 있었다. 우리는 그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있었다.
자, 가벼이 웃고 있는 그를 보라.
그는 가장 올의 부족과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흙 날리는 흙먼지를 보며 웃고, 가끔 흙바람이 불어 누군가의 눈을 덮칠 때면 미처 눈을 뜨지 못하는 사람을 보며, 어깨를 두드리고 장난을 칠 수 있을 정도로 넉살 좋은 성격이었지. 그 때문에 그에 대한 첫인상은, 괜히 장난칠 거리를 만들지 말라 했다. 무례한 장난은 치지 않으나, 소소한 장난은 시시콜콜하게 걸어온다. 이는 처음 보는 이, 자주 보는 이, 사이가 좋지 않은 이도 가리지 않는다. 넉살 좋다는 말은 이럴 때 쓰이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는 모든 것이 순리라 여긴다. 흘러가는 바람도, 저무는 태양도, 시드는 초목도, 모두. 환상종을 적대하지 않는 거의 유일한 민족이란 말에서 비롯되듯, 그는 그 말에 속하는 자였고, 그것을 증명하는 자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건 바람직한 자세인가? 누군가는 그를 힐난할지도 모른다. 불의 앞에서도 그것이 순리라며 넘어갈 것이라며 손가락질당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순리란 그런 것이 아니던가. 첨언하지 않고, 따르지 않고, 강요하지 않고. 그런데도 만일 누군가가 그 일에 나선다면, 그 또한 순리라 여길 것이다. 모든 삶을 존중하는 것. 그게 그의 가치관이다.
그렇다면 그가 가장 아끼는 것은, 어여삐 여기는 것은 무엇일까. 그건 사람이고, 또한 사람이다. 그는 그 누구보다도 사람에게 공감하고 사람을 아낀다. 부조리하게도, 그게 그런 사람이다. 자신도 그게 옳은 일인지 판가름하지 못한다. 그저 애정을 다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게 어떤 사람일지라도, 사람이기에 손안에 두고 싶다고 말한다. 제 손을 떠나갈지라도 한 번쯤은 잡아보고 싶다고 말한다.
그럼 우리들은 그에게 묻고 만다. 너는 그래서 무엇을 얻었느냐고.
그럼 그는 말한다. 나는 당신들을 볼 수 있었노라고.
정령사
흙 속에서 자라난 것으로 흙 위의 것을 치료한다.
환상종이 피워내는 초목은 그의 손에서 약이자, 독으로서 탈바꿈된다.
─ 맹약의 영향인지, 신체의 통각에 다소 둔감해졌다.
통각에 둔감해진 만큼 추위도, 더위도 덜 타는 모습을 보였다.
마치 신체의 일부분이 진흙이 된 것처럼 말이다.
기타
올(УЛААН)의 부족.
─ 그들이 지나간 곳에는 항상 흙먼지가 인다고 하여, 흙먼지족이라 불리는 경우가 잦다. 자신들 또한 올족이란 이름 앞에 흙먼지를 언급하는 경우가 잦으니, 올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흙먼지만 기억하는 자들 또한 더러 있었더랬다. 그들에게 지키는 가장 최상의 예의란, 흙먼지를 몰고 온 땅의 부족이라 지칭하는 것. 감히 이 땅 아래 선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최상의 찬사라 지칭하고 있다.
─ 흙먼지족이라 불리는 만큼, 이들은 항상 초원을 유랑하며 목축지를 도는 유목민의 삶을 산다. 사람의 발에서 흙먼지가 일고, 그들을 따라 걷는 소와 염소, 양들의 발굽에 의해서도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오른다. 다른 부족과 연락을 주고받고자 독수리를 키우는 자들 또한 더러 있으며, 독수리의 먹이는 저들이 기르고 있는 가축을 내어놓는다.
─ 부족장은 야브강ЯВГАН. 부족장의 자리는 혈연을 따라 대물림되지는 않으나, 대체적으로 혈연을 따라 되물림되는 편이었다. 예외적인 경우는 부족장이 물러날 나이가 되었음에도 혈족 중에 성인이 된 자가 없었을 경우인데, 이때는 다른 자를 부족장으로 추대해 부족의 순리에 따랐다. 야브강의 유일한 혈족인 나란НАРАН의 나이가 어려, 다른 이가 부족장이 되는 것이 아니냔 말이 나온 적이 있었다. 이제 막 다섯 살이 된 아이가 부족의 미래를 이끌어갈 순 없지 않는가.
─ 그 당시 성년 근처였던 모든 부족민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야카? 성미가 급해. 사바하? 가축을 잘 돌보지 못해. 미와? 상냥하지만 강단이 없어. 그러면은… 샤와르? 그 말에 모든 부족민들이 웃었다. 샤와르가 부족장이 된다면 하루에 한 번 모든 부족민들이 부족장의 장난을 견뎌야 하는 규율이 생기는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사람들은 다들 손사래를 치며 야브강이 오래토록 부족장의 자리에 머물다가 나란에게 부족장의 자리를 물려주길 빌었다. 정작 그 얘기를 들은 샤와르 또한 자신은 부족장과 아무런 연이 없는 사람일 것이라며 어깨를 으쓱였지. 볕이 따사롭던 해, 지나가던 우스갯소리였다..
─ 혈연으로 묶이지는 않았으나, 나란은 샤와르를 잘 따랐다. 차기 부족장이 장난치길 좋아하는 샤와르를 따른다니,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었지. 하지만 갓난아이였을 적부터 배다른 동배처럼 챙겨주고 예뻐했으니, 다들 샤와르가 장난을 덜 치라고 할 뿐 둘이 형제처럼 지내는 걸 만류하지는 않았다. 부족장이었던 야브강 또한 종종 샤와르에게 나란을 맡기기도 했으니, 영락없이 형 취급을 당한 셈이기도 했다. 간혹 샤와르가 아이를 보는 게 무섭지 않으십니까, 라고 다른 부족민이 물으면 야브강은 “샤와르를 두려워한다면은 우리가 걷고 있는 대지가 언제 꺼질지 두려워하는 것과 같소.” 라고 답하는 것으로 모든 말을 일축시켰다.
─ 올족은 모두 자연의 흐름을 따라 나부끼는 초원의 잔풀과 같다.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규율은 오로지 하나, 나로 하여금 타인을 보고, 타인으로 하여금 호흡하여 삶을 영위하는 것. 이 땅 만물, 모든 곳에 깃든 삶과 생을 아끼고 어여쁘게 여기라고 가르치는 것과 같다. 올족은 부족 전체가 애니미즘 그 자체를 배우고 따르기도 하면서, 또한 따르지 않는 것과 같다. 마치 흙에 대고 너희가 흙이냐고 물으면 흙이지만, 구태여 흙이라고 지칭할 이유가 무엇이겠냐며 답하는 것과 같다. 다소 난해한 말이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은 그 무엇에도 연연하지 않고, 자신들이 아우를 수 있는 것이라면 순리이겠거니 하고 받아들인다는 뜻이었다.
─ 올족이 지향하는 것은 융화다. 이건, 화합도, 평화도 아니다. 들판의 초목이, 잔풀이 제각기 하나의 풀처럼 보이지만 뿌리가 얽히고 얽혀 하나가 된 것처럼 되길 바라는 것이었지. 환상종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대항조차 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녔다. 유랑하는 이들답지 않은 전투력을 가지고 있으나, 드러내는 법은 없다.
─ 가끔, 십 년에 한 번쯤 약 한 해를 한 자리에 머물며 제를 바칠 때가 있다. 이때 제를 바치는 대상은 자신들이 살아가고 있으며, 발을 디딛고 있는 대지를 향해서다. 이때 쓰이는 땅은 더는 초원을 유랑하지 못하는 올족의 이들이 기거하고 있는 땅에서 이루어진다. 제를 바칠 때 빼고는 방문하는 경우가 희박하니, 올족에게 있어서 기거하는 땅은 매장지라 불리기도 한다. 초원의 잔풀처럼 살아가는 그들이지만, 죽을 때는 꼭 그곳으로 돌아와 땅에 묻혔으니 그리 불릴 법도 했다. 머물러 있는 이들도 죽음을 목전에 둔 이들, 그들을 돕는 가족 몇이 전부였으니 오죽했을까.
─ 죽은 자는 생전에 기르던 독수리 깃털 하나, 목축의 뼈 하나를 가슴팍에 올린 채 땅에 매장된다. 자연의 순리, 이치, 이 모든 것은 땅이자 하늘로 돌아감을 알리기 위함이다. 간혹 화장을 원하는 자가 있을 경우, 가장 잘 키운 목축 하나를 같이 공양해 불태운다. 이때 남은 재는 땅에 묻지 않고 바람에 날려 보낸다.
─ 부족 내에서 목축의 상처를 치료하고, 부족민들의 건강을 책임진 것도 샤와르였다. 넉살 좋은 성격은 병자가 있는지, 없는지를 헤아리는 행동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누군가는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그와는 크게 상관없는 천성이 가깝지만 말이다. 약학과 의학은 혈족을 통해 내려오며, 이는 찬트와 샤머니즘… 즉, 애니미즘과도 연관이 있다. 땅에서 난 것으로 땅 위의 것을 치료하기에, 치료할 수 없는 상처 또한 생의 섭리라 여기며 고요한 끝을 맞이할 수 있게끔 돕는다.
본래 그의 부모였던 아당카와 칸자의 몫이었으나, 둘이 매장지의 환자 곁으로 간 뒤에는 오롯이 유랑하는 올족의 건강을 책임지는 것은 샤와르의 몫이었다.
─ 그가 맹약자가 되었을 때, 부족민들은 여타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였다. 단지, 어찌 그리 쉽게 목숨을 내어놓으려고 하였냐면서 타박했다. 애정에 따른 질타였던 것이다. 샤와르는 그저 웃었다. 그 대신, 땅으로 꺼진 이들은 어찌 할까요? 라고 물었지.
─ 한 해가 지나, 매장지에 머물고 있던 부모님이 다시 유랑의 일원이 됐을 때, 그는 미련없이 떠나겠노라 말했다. 마치 바람같은, 남긴 것 하나 없는 잔풀 같은 떠남이었다.
찬트Chant.
─ 찬트는 기본 소양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울족에서 찬트는 빠질 수 없는 증명이기도 했다. 찬트를 통해 자연의 섭리를 배우고, 찬트를 통해 가축을 다루며, 찬트를 통해 죽은 이의 삶을 위로한다. 이만큼 삶에 밀접해 있기 때문에, 말문이 틀 무렵부터 찬트를 가르치는 걸 미덕으로 삼는다. 샤와르는 그런 미덕을 충실하게 수행한 사람 중 하나였다.
─ 부족민들이 말하길, 그가 부르는 찬트는 참으로 성격과 달리 애절하다고 하더라. 그는 그 말을 들으면 그저 웃기만 했다. 본인 또한 찬트를 부르는 걸 좋아했으니, 힘들이지 않아도 혼자 흥얼거리며 부르는 걸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 그는 가끔 자연을 숭배하는, 애니미즘과 연관된 찬트를 부르기도 했다.
호불호.
─ 좋아하는 것은 특별나게 없다. 두루두루 좋아한다고 말해도 좋을 지경이었지. 그나마 콕 찝어서 말하라고 하면 초원이라고 한다. 자기가 나고 자란 곳 말이다. 또한 양이라고도 말했다. 목축견에게 도전하는 모양새가 귀엽다나.
─ 싫어하는 것에 대해 물으면 조금 기묘하게 웃기만 했다. 본인 말로는 딱히 없다고 답했다. 다만, 새까만 밤은 썩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빛 한점 들지 않는 어둠을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지 않겠냐면서 말이지.
엔키두
그것이 있는 곳은 땅울림이 멈추질 않았지.
하지만 땅울림이 멎은 곳엔…
속성은 대지, 흙. 태초의 형태는 진흙으로 빚어진 인간이었을 터, 허나 지금은 감히 살아숨쉬는 인간을 닮은 모습을 표방하여 대지를 흔들고 식물을 자라게 하는 땅을 걷는 살아있는 진흙 인간. 하지만 사람의 입으로 그것을 인간이라 말해도 되는 걸까?
감히 인간인 줄 알고 접한 자, 불시에 찾아오는 땅울림 속에 땅을 갈라 새까만 지저 속, 자신의 뱃속으로 사람을 삼켜낸다. 면적은 넓지 않다. 고작 사람 하나의 공간, 발을 헛디뎌서 까마득한 웅덩이 속에 빠져 사라지듯 땅속으로 꺼질 뿐이지. 땅이 꺼져서 죽는 것은 일종의 불상사에 가깝다. 그래, 고작 불상사다.
땅울림이 들리거든, 발밑에 납작 엎드려서 움직이지 말라.
네 한 걸음이 새까만 땅속에 매장될 토장土葬이 될 수도 있으니.
하지만 그것의 본질은 결국 재생이자 순환이다. 죽지 않는 진흙 인간. 흙은 모든 것을 자라나게 하는 토양이요, 생을 숨쉬게 하는 증거이니. 그것은 땅의 섭리를 비틀어 땅 위에서 자라날 수 있는 것들을 자라게끔 만든다. 죽어버린 땅에 자랄 수 없을 초목이 자라게 만들고, 평범한 초목을 독이자 약으로 만든다. 그러면서 땅 위에 있는 것들을 죽게 만들어 대지의 양분으로 삼아 또 다시 푸름을 재생시킨다.
그것 자체가 대지이자, 흙이자, 토양이니 땅의 소리를 듣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내가 내뱉는 목소리를 못 듣는 건 기이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것을 화나게 하지 말라.
땅이 꺼지는 것보다 무서운 건, 내가 발 딛고 서있는 땅이 나의 적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보편적으로 보이는 형태는 열살 안팎의 사람 모습으로, 그냥 보아서는 사람과 분간이 어렵다. 초목과 토양의 색을 띤 외형을 통해 어림짐작할 수 있을 뿐. 간간히 진흙이 말라 모래가 떨어지는 경우가 있었다. 흙을 밟아서는 발자국이 남지 않고, 바위 같은 것을 밟았을 때만 진흙 자국이 남았다. 본모습은 모든 게 진흙으로 이루어진 사람 형태로, 눈에 보이는 연령대는 의미가 없다. 간혹 작은 토기 인형 같은, 손바닥 만한 크기의 형태로 있기도 했다.
성질
─ 그것은 항상 제 정령사 곁에 있다. 어깨 위에 작은 토기 인형처럼 있다거나, 품 안에 들어가 있다거나, 혹은 발 근처에 머물며 있다거나. 어느 형태로든지 간에 제 맹약자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근처를 서성인다. 샤와르는 그것을 챙기는 게 익숙한 것처럼 굴며 친근하게 대했다.
─ 걷는 걸음마다 초목이 자라났다. 보통은 작은 식물들이 주를 이뤘으나, 터만 제대로 잡혀있다면 하루 사이에 작은 나무 묘목이 자라나기도 했다. 보통은 그 자리에서 급속도로 성장했다가 시드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제대로 식물이 자라나기 위해서는 오래토록 한 자리에 머물 필요성이 있었다. 역으로 말하자면, 오래 머물수록 식물이 터를 잡는다는 소리였다.
─ 성격은 알 수 없다. 제 맹약자 말고는 도통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애초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조차 판가름하기 어려웠다. 표정없는 얼굴로 바라보는 모습은 흡사 조각상을 보는 감상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겠지. 맹약자는 그 표정을 더러 알아보는 편이었으나, 알아보기만 할 뿐 크게 반응하지는 않았다.
─ 가끔 그것의 몸속에서 땅울림 소리가 났다. 맹약자는 그 소리를 듣고 배고프냐는 말만 뱉었다.
─ 그것은 해가 떠있을 때를 가장 좋아했다. 해가 사라지면 여느 식물들이 그렇듯 잠을 자듯이 조용해졌다. 원래 조용하기도 했지만 더더욱 움직임이 없다고 해야 할까. 마치 둥지 속에 똬리 틀고 있듯이 얌전히 있으니, 맹약자는 그것을 석고상처럼 챙겨서 다녔다.
─ 그것은 가끔 식물 씨앗을, 잎들을 먹었다. 먹었다고 해야 좋을까? 텅 빈 몸속에 집어넣어 모았다. 가끔 맹약자가 손을 내밀면, 온전한 형태의 잎과 씨앗을 선물하듯 건네줬다.
약속의 계기
늦은 밤이었다. 걷는 걸음마다 저가 밟는 게 땅인지, 풀인지, 혹은 뼈인지도 모를 어두운 밤이었다. 방랑하는 올족에게 있어서 그리 이상할 것도 없는 날이기도 했지. 그래서 다들 자연스럽게 걷고, 또 걷고, 그렇게 걷길 반복하던 중 발소리가 하나씩 잦아들었다.
눈을 돌리면, 땅이 꺼져있었다. 불상사였다. 하지만 또 땅이 꺼졌다. 이 또한 불상사였다. 그렇게 땅이 꺼지고, 또 꺼지고. 이제는 불상사라 불러도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갈 길을 재촉하던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췄음에도 거대한 발걸음 하나가 사라지질 않았다. 아니, 그건 발걸음이 아녔다.
땅 울림이었다.
대지가 울고 있었다. 발을 멈춘 사람들은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유독 푸른, 이 땅에 자라날 리 없는 식물들이 한껏 피어오른 것이 손에 잡혔다. 기이한 일이었다. 이 땅은 먹을 것이 없어 목축지로 적합하지 못하건만. 마치 온 땅에 싱그러운 식물이 돋아난 듯했다.
달빛이 드리운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때에도 땅 울림이 들렸다.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벌어진 땅 너머로 가라앉고 가라앉아, 점점 멀어지는 게 들렸다. 벌어진 땅 옆에, 그것이 서 있었다.
사람? 아니, 저건…
또 땅이 벌어지는 모습을 보기 직전, 샤와르는 지체없이 앞으로 나서서 토지 아래 무릎 꿇었다. 땅에 이마를 대고, 식물을 손아귀에 한껏 쥔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이것은, 그것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그것에 이유를 알 수 없는 공포가 밀려왔다.
이건, 그래.
자연에 대한 공포.
샤와르는 알음알음 전해지던 구전을 떠올렸다.
땅 울림이 들리거든, 발밑에 납작 엎드려서 움직이지 말라.
네 한 걸음이 새까만 땅속에 매장될 토장土葬이 될 수도 있으니.
제 목숨, 땅에서 나고 자라 땅에서 살아가고 있으니 내놓는 것에 거부감은 없었다. 유랑이란, 결국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르는 순리였으니. 제때 치료받지 못한 이가 땅에 묻히는 것도, 그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것도 여러 차례 보아온 모습들이었다.
하지만, 불상사로 죽는 것은 섭리와는 다르지 않는가.
그러니 입을 열었다. 한 음절씩, 또박, 또박.
저를 드리겠습니다. 이 땅 아래 저를 토장하시고, 길을 만들어 주십시오.
그러자, 사람의 모습을 한 진흙이 말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