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 안…. 무서워. 나, 나는 바이킹…! 이니까… ”
바위섬들의 가장 꼭대기, 바다 건너에서는 초원보다 눈 덮인 산자락이 보이는 그곳.
1년에 딱 두 달, 한밤에도 태양이 자리한 달에 태어났다.
외관
(지인 커미션)
- 육체의 강함이 곧 권력이자 상징인 자들의 무리에서 훌쩍이는 아이를 찾기는 어렵지 않다. 누가 그를 보고 바이킹의 후예라 하겠는가. 비 오기 직전의 바다와 같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보일 듯한 눈은 늘상 주변을 살핀다.
- 아주 작지도, 그렇다고 또래보다 크지도 않은 것은 아이에게 되려 덕이다. 가뜩이나 심약한 녀석이 개중 제일 작다면 멸시를 당할 것이고 반대로 컸다면 덩치값을 못한다 타박을 받았을 것이 자명했다.
- 바위틈에 자라는 풀들이 어딘가의 초원에서 보이는 그것과 같이 푸르르지 않은 탓에 부족의 아이들은 그를 ‘바위초’라고 부르더라. 암초지대에서 자라는 ‘바위초’와 같은 색의 머리카락 때문이다. 해풍을 맞아도 죽지 않는 지독한 놈의 색뿐만 아니라 성질마저 닮았는지 그의 머리칼은 억세고 제멋대로였다.
- 스페쿠가르의 아이들은 ‘어린 해마(海魔: 스페쿠가르 인근해에 서식하는 해양생물로, 바다사자와 유사하나 갈기를 가지고 있다.)’ 이빨로 만든 장신구를 착용한다. 장신구에 달린 치아의 크기와 개수가 보호자의 강함을 증명하며, 다른 부족으로 하여금 아이가 스페쿠가르의 보호를 받음을 명시한다.
- 바위섬은 척박하다. 명주실을 짜서 부드러운 천을 입을 수도, 심지어 목화를 심을 토지조차 마땅치 않기에 ‘바위초’의 뿌리를 삶아 직물을 짠다. 그렇게 만들어진 천은 염색을 하더라도 색이 곱지 않고 천이 투박하여 보기 좋은 모양을 내기에 적합하지 않다. 대신 10여년을 입어도 끝이 헤질지언정 찢어지거나 공연히 구멍이 생기는 일은 전무했다. 그렇게 만들어 입은 아이의 옷에는 바다의 짭짤한 향이, 어쩌면 바위에서 찾을 수 있는 서늘한 내음이 묻어났다.
성격
걱정과 공포, 겁쟁이 l 협조적인, 단순한 l 배려와 다정
“그 애는 정말이지 구제불능이야.”
어깨에 큰 흉터를 훈장처럼 내놓은 여자는 코웃음을 치며 나무 탁자 위에 도끼를 내던지듯 내려놓았다. 의자에 모여 앉아있던 여자의 아이들은 소리를 죽여 웃는다. 개중 나이가 많아 보이는 남자아이가 할 말이라도 있는지 손을 번쩍 들고 발꿈치를 부산스레 올렸다 내린다.
“마르는 매일 혼자 있어요!”
“아냐, 만날 아네 언니 옆에 찰싹 붙어 있어.”
남자아이의 여동생은 입에 검댕을 잔뜩 묻히고 제가 본 것들을 또랑또랑 증언한다. 환상종이 나오는 구전동화를 들으면 몰래 훌쩍훌쩍 울었더라, 바다로 다이빙도 못하더라, 달리기가 느리고 바위를 못 탄다. 마치 그것이 어린 바이킹들의 교양인 것마냥 말하다 어느새 자신의 무용담을 재잘거린다. 아이들의 아버지는 남매의 손에 구운 감자를 쥐어주며 걱정스런 투로 ‘위대한 안다르타와 아네가 걱정이지.’ 라며 아내에게 눈치를 주었다. 아이들의 편견에 힘을 실어주는 그녀의 태도에 대한 책망이 묻은 시선이었다.
그들의 말마따나 마르돌은 실로 소심한 아이다. 당장 지금의 상황만 보더라도 그의 성정이 어떠한지 보일 것이다. 마르돌은, 그러니까 일가족의 이야기를 문 밖에서 숨죽이고 듣고 있는 아이는 소쿠리 채로 들고 온 호밀빵 위에 눈물이 떨어질까봐 눈에 힘을 잔뜩 주고 있으니 말이다. 마르돌의 머릿속은 여러 선택지로 인해 아주 바빴다. 하나, 문을 박차고 들어가서 자신의 용맹함을 보여줄지(방법은 강구하지 못했다.) 둘, 바이킹처럼 멋지게 들어가 호탕하게 웃으며 호밀빵을 건네줄지(자신은 없었다.) 셋, 호밀빵이고 나발이고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의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하소연이나 할지(꼴에 이건 자존심이 상했다.) 결국에 그는 소쿠리를 문 앞에 내려두고 호밀빵 두덩이를 몰래 품에 숨긴다. 똑똑, 작게 노크를 하곤 문이 열리기도 전에 부리나케 자리를 떴다. 달리기가 느리다던 여자아이의 증언이 무색해질만큼 빠르게. 품 안에 숨긴 호밀빵이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양심의 무게더라.
10대 초입에 막 들어선 아이들이 으레 그렇듯이 마르 또한 어딘가 방어적이고 반항적인 면모가 생기기는 했다. 이를테면 자고 일어난 뒤에 침대정리를 하지 않는다거나 방에 들어가면 문을 꼭 닫는 것과 같은 일들 말이다. 시간은 많은 것을 변하게 하나 바꾸지 못한 것이 있다면 그건 마르돌의 공포다. 아이는 여전히 까마득한 절벽 아래가 무서웠고, 잠결에 듣는 바닷바람 소리가 비명처럼 들렸으며, 해체된 생선의 대가리와 초점 없는 그들의 눈이 꿈에 나올 정도로 끔찍했다. 그런 아이에게 삶은 그 자체로 일련의 도전이자 시험이었기에, 그는 일상 곳곳에 공포에 대응할 장치들을 만들어 놓았다. 절벽 앞에서는 보다 까마득한 하늘을 올려보았고. 모두가 잠든 밤, 귀를 울리는 비명같은 바람소리에는 뿔소라 껍데기를 귀에 바짝 가져다 댔으며. 생선구이를 먹을 적엔 꼭 대가리를 먼저 입에 욱여넣었다. 설령 다리가 떨리고 그날 밤에 잠을 뒤척이고 헛구역질을 하더라도. 마르돌은 절벽 아래를 마주할 수 있었고 바람소리보다 파도소리에 귀를 기울였으며 공허한 눈알들을 목 아래로 넘길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에게 있어 모든 규칙과 약속은 위험천만한 세상에서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최선의 방패였다. 약속은 곧 울타리였으며 그 울타리의 안은 안전하다. 단순하고 명료한 사고였다.
그리고 아이의 첫번째 약속은 애정이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이마에 내려앉았던 양친의 입맞춤과 그들의 자장가는 어떠한 것보다 끈질긴 규칙이다. 겁보다 정이 많은 아이는 제 바닥을 계산치 아니하고 마음을 준 이들에게 속절없이 퍼내주었다. 저보다 어린 아이들이 노는 마당에 개가 이를 드러내고 위협하고 있다면 그렇게 겁 많은 애가 작대기를 들고 큰 소리를 치며 달려들었다. 또래 친구들이 모두 무서워하는 유령선(그저 낡아서 사용하지 않는 배이다)에 탐험을 하러 갈 때도 항상 앞장섰더라. 배짱과 호승심과는 결이 다른 용기였다. 비록 민담에 나오는 영웅처럼 믿음직스럽지는 않아도 그가 두려움보다 당신을 생각함이 중요한 것이다. 공포를 마주하는 것에 대한 보답이 없어도 좋았다. 그는 돌아오는 것을 따질 정도로 머리가 비상하지 않아서 네 개를 주고 하나를 돌려받더라도 그것으로 족했다. 부족은 마르돌의 전부다. 그래, 전부.
샤먼
피부 아래에는 피와 함께 해수가 흐른다.
무당, 샤먼… 무엇이라 부른들 그는 일족의 배신자일 뿐이니
스페쿠가르의 보호를 등진 아이야,
이제 울타리를 뛰어넘어 항해를 시작하라.
기타
스페쿠가르 ::
“우리는 신도 악마도 믿지 않는다. 오직 우리의 한계를 숭배할 뿐이다.”
- 케렌의 가장 북쪽 끝에 위치한 바위섬의 이름이자 그곳에 거주하는 부족의 이름이다.
- 스케네마에서 불어오는 동풍으로 인해 여름이 서늘하고 한류성 어족인 ‘해마’의 군집지이며 해마 어포와 이빨을 다른 부족에게 판매하기도 한다. 일정한 화폐가 존재하지 않아 물물교환을 중심으로 한다.
- 지형이 험준하고 평지가 없어 개간이 불가하다. 그나마 있는 평지에서는 호밀과 같은 식량 작물을 재배한다. 주민들은 바위틈에 오두막을 짓고, 나무다리로 집과 집 사이를 이어 왕래한다. 케렌의 많은 부족들 가운데에서도 차지하고 있는 영역이 적어 유난히 외부인에 대한 경계가 심하다.
- 스페쿠가르에는 약 50여가구가 거주한다. 아이는 가옥당 많으면 다섯을 낳으며 어린이들의 교육은 가정에서 전담한다. 다만, 열 둘이 넘은 아이는 보호자와 함께 사냥제에 나선다. 이때 잡아오는 사냥감의 개수로 위대한 안다르타의 동행자가 될 자격을 갖는다.
위대한 안다르타와 아네 ::
“ 뱃머리 가장 위에 설 자, 우리의 잔이 마르지 않게 뿔나팔을 불어라.“
- 위대한 안다르타는 족장을 부르는 말이다. 족장이 되기 이전에 어떤 이름을 갖고 있었든지 그 자리에 오르거든 안다르타라는 이름을 수여받는다.
- 족장이 되는 방법은 당대 족장이 결정한다. 다만 기본적으로 항해술, 사냥술, 토지 이용, 무력을 평가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차기 안다르타로 주목되는 자는 붉은 머리의 아네이다.
- 아네는 마르돌 아버지의 사돈의 팔촌의 조카이다. 따지고 보면 생판 남이나 다름이 없는 사이지만, 마르돌의 친모가 아네의 스승격이 되던 사람이었기에 그녀의 죽음 이후 아네가 마르돌의 보호자 노릇을 하고 있다.
- 마을에서 가장 빛나는 아네에게 달린 혹같은 마르돌은 늘 마을의 걱정이었다. 열일곱인 아네가 마르돌보다 뛰어남은 당연한 사실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아니었다. 아무튼간에 가족이지 않냐는 주장이다.
- 마르돌에게 아네는 자랑이자 낮은 자존의 근원이다. 그녀는 마르돌에게 한없이 자상했으나 최근에는 그것이 되려 입안의 가시처럼 느껴졌다. 저열한 열등감이다.
마르돌, 바다를 밝힐 사람 ::
“ 이러면 안돼, 마르돌. 내가 이러면 안되는 거야. ”
불이 꺼지지 않는 밤이었다. 하루 살아가기 급급한 가난한 부족이 공터에 불을 켜고 둘러 앉아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춤을 추는 일에는 차기 족장의 결정 외에는 없었다. 은연중에 차기 족장이 아네가 될 것이라던 여론이 확증받는 귀중한 날이었다. 늦은 밤까지 사람들의 웃음소리는 끊이질 않았고,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저들마다 놀이를 하는 안온한 밤이다.
그럼에도 홀로 떨어진 사람이 마르돌이다. 중앙 공터의 불길이 닿지도 않을 곳에 쪼그려 앉아 무릎에 얼굴을 파묻은 마르돌은 소리도 없이 어깨만 들썩이며 울고 있었다. 친언니와 같은 아네의 경사에 꽃을 꺾어 화관까지 만들었는데 애써 만든 화관은 손에 들려 생기를 잃었다.
화관이 싱그러울 때로 시간을 거스르자. 저녁 노을이 아네의 붉은 머리를 더욱 찬란하게 비출 때, 안다르타는 그녀의 얼굴에 푸른 염료로 족장의 증표를 그려주었다. 사람들은 환호를 치고 박수소리는 우레와 같았다. 아이들은 각자 선물을 품에 안고 스페쿠가르의 작은 별에게 달려가 축하의 말을 전하며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 속에는 마르돌 또한 있었다. 보라색 야생화를 꺾어 만든 화관을 아네의 머리에 씌워주려던 순간 풉, 하고 웃음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지만 사람들은 모두 환호하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작은 비웃음이 마르돌을 압박했다. 찰나였지만, 그것은 해일이 되어 아이를 덮쳤다. 그대로 등을 돌려 뛰쳐내려갔다.
그렇게 밤이 되었고, 그는 어떠한 결심을 한다.
곧 있을 사냥제에서 자신을 증명해보겠다고. 꼭 그렇게 해 보이겠다고.
그리고 아네에게 전하지 못한 축하의 말과 선물을 전해주겠다고…
투박한 가죽 가방 :: 바짝 마른 호밀빵 두 개, 뿔소라 껍데기
“ 마르, 내 작은 등불아. 삶에는 버릴 것이 없단다. “
그러니 네가 품을 수 있을 만큼을 담아야 해.
… 얼마나요…? 너무 어려워요.
어린 딸을 바라보는 아비의 눈이 다정하다. 글쎄, 얼만큼이 좋을까. 중얼거리며 일어나는 남자의 몸이 위태롭게 휘청이자 딸아이는 그의 옆구리로 뛰어가 허리춤을 붙든다. 똑닮은 부녀의 눈이 마주치면 금세 하하, 서로 웃는다.
좁은 집에는 흔한 가죽 장식도, 무력을 자랑할 만한 이가 빠진 도끼마저도 없었다. 이 집의 생계를 책임지는 자의 부재함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나마 넓은 탁자에는 무두질을 하고 남은 가죽들이 쌓여 있었다. 남자는 작업장 아래 나무 상자에서 몰래 숨겨두었던 가죽 가방 하나를 꺼내었다.
그래, 이정도가 어떻겠니. 딱 여기 담길 만큼 품으렴.
버리지 말고, 신중히 골라서 담아.
마엘스트롬
큰 소용돌이
아이의 손바닥만큼 작은 것부터 크게는 집 한 채를 집어 삼킬 정도에 이르는 경우가 있다.
시간당 8km의 속도로 회전을 하는데 선박이 휘말릴 경우 빠져나오지 못하는 일이 부지기수이다.
강한 바람과 조류, 지형 등 다양한 원인에 의해 만들어지는데 아주 드물게도 넓은 바다에서 소용돌이가 발생하기도 한다. 만약 당신이 가는 길목에서 그것을 마주하거든 반드시 뱃머리를 돌려야 할 것이다.
성질
바이킹들이 ‘바다꼬마’라는 멸칭을 주었다. 우스꽝스러운 이름은 두려움을 잠재웠으나 이름을 받은 현상은 종종 꼬마의 모습을 흉내내어 민담을 장식한다. 다만 현상은 현상일 뿐, 당신에 대한 악의를 품지 않는다.
형체가 없는 그것은 발 밑의 물웅덩이로, 찻잔 아래의 회오리로 또는 공기중에 나부끼는 동그란 물방울로 남아 맹약자의 곁을 맴돈다. 비록 마르돌이 마엘스트롬과의 교감을 원치 않아 늘 무시당하는 꼴이지만 그래도 개의치 않는다.
제 맹약자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 굳이 언어로 표현하지 않아도 제 의사를 마르돌에게 보일 수 있으나 구태여 문자가 되어보였다. 배를 삼키던 소용돌이는 꽃이 되었다가 나비가 되고, 작은 컵의 물이 된다. 일방적이고 맹목적인 애정이다.
약속의 계기
1, 첫 번째 항해.
밤의 바다는 짐승의 아귀다. 생을 먹어치우며 몸을 부풀린다.
억눌린 치기가 밤을 깨우고 닻을 올린다. 증명하고자 하는 마음이 바다를 울린다.
바다는 흉흉했고, 물살은 여느 때보다 거셌으며 눌러 담은 설움이 눈을 가렸다. 판단이 흐려진 마르돌이 나룻배의 닻줄을 푼다. 행운인지 불행인지 그의 보호자인 스페쿠가르의 작은 별 ‘아네’가 그와 동행한다.
아네는 가히 훌륭한 인재지만 경험이 풍부한 자가 아니다. 그가 마르돌을 붙잡지 않고 동행한 것은 실력에 대한 자신감, 마르돌에 대한 책임감, 그리고 아주 약간의 오만함. 열둘의 설움과 열일곱의 만용이 나룻배를 뒤집었다.
아니다, 짐승의 아귀와 같이 휘몰아치는 그것이 뒤집었다. 아네는 부서진 판자에 머리를 맞아 정신을 잃었다. 그 기묘한 소용돌이가 아네를 휘감는 것을 마르돌은 보았다. 저것이 필히 그를 삼키리라.
2, 두 번째 항해.
아네를 풀어줘. 입을 벌리자 짠물이 비강을 뚫고 침범한다. 고요한 외침은 발악이 되어 형체도 없는 것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일족의 길잡이다. 한심하고 볼품없는 자신을 대신해 죽을 존재가 아니었다.
무서워서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눈물이 나던 민족의 적이 눈앞에 있었음에도 마르돌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렇게 영혼 하나와 목숨 하나를 맞바꾸었다. 물 아래에서 뭍으로 내던져진다. 눈에 들어온 마을은, 나의 가장 안온한 울타리는 성벽이 된다. 자신을 품어주지 않을 차가운 벽이 된다.
바다에서 태어난 자가 그렇게 바다를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