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걱정 마, 꼭 돌아와서 이야기를 들려줄게. ”
외관
- 여러 색으로 자수가 놓아진 판초는 움직임에 따라 가볍게 나불거린다. 마른 나무껍질 색의 피부에 하늘 빛이 도는 홍채, 머리칼은 하늘보다는 깊은 바다 색과 닮았다. 키는 또래보다 조금 작거나 평균에 가까우며, 자세와 걸음걸이가 곧고 골격에 따라 균형 있게 몸이 잡혀 있다. 진한 눈매와 두껍지만 꼬리가 내려간 눈썹 탓인지, 인상에서 투박하고 온화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 그와 대조되게, 옷차림은 매우 눈에 띈다. 윤기 나는 머리카락은 양쪽으로 굵게 땋고, 삐져나온 부분들은 다시 구슬에 꿰어 자잘하게 꾸며내고. 금혈석으로 만들어낸 장신구들과 눈 밑에 바른 부족 화장까지. 어지럽게 화려한 차림새와는 달리 손발에는 굳은 살이 가득했다. 자신이 걸친 대부분의 것들이 제 손으로 만들어졌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 판초를 안에는 얇고 활동성 있는 내의를 입고 있다. 거추장스러운 경우가 많은지라 실내에서나 움직일 일이 많은 날은 외투를 벗어두는 경우가 잦았다. 그럴 때면, 양어깨와 팔을 거친 커다란 문신이 자연스레 드러났지만 크게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성격
keyword : 느긋한, 사려 깊은, 남을 챙기는, 새로움에 대한 열망, 낭만적인, 가끔 엉뚱한
“얀은 작은 계기로도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재능을 타고났을지도 몰라.”
입가에 얕게 흩어진 미소와 느리지만 완곡한 말씨. 표정과 몸가짐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느긋함에 가깝고, 성정 또한 그러하다. 그는 타인과 마주할 때, 감정적 압박을 하지 않도록 특히 주의하는 부류라고들 한다. 종종 말에 답하기 전에 잠시 뜸을 들이곤 하는데, 어떤 표현을 사용해야 듣는 이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지 고민하다 생긴 버릇이더라. 대체로 심성이 바른 이로 평가받기는 하나, 특유의 굼뜬 발화가 답답하다거나, 자기주장이 없어 보인다는 말 또한 자주 듣는 편이다.
행동으로 타인을 챙기는 것에도 익숙하다. 그가 말하길, 손아래 동생이 열넷이나 되기에 그렇다고. 그래서인지, 자신보다 연소한 이를 살피는 것에서만큼은 집요해 보인다. 그가 자신의 아집을 드러내는 몇 안 되는 부분이긴 하나, 상대가 싫은 티를 팍팍 낸다면 한발 물러나기야 한다. 하지만 개 버릇 남 못 주는지 금세 돌아와서는 머리가 흐트러졌다고 자신이 땋아주어도 괜찮은지 따위를 물어보는 것이다. 그의 쇠고집은 이러한 부류의 친절에 익숙한 이라면 모를까, 원치 않는 이에게는 당연히 고역이 따로 없다. 그에게 시달리던 이가 대체 왜 이러는 것이냐고 묻기라도 한다면, 스스로도 확신이 없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다가 이리 답할 뿐이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인걸.
참견쟁이임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고리타분한 소리만 늘어놓지는 않았다. 창공을 가로지르는 참매가 떨어뜨린 깃의 감촉은 어떠한지, 처음으로 마주한 바다는 어떤 색으로 빛났는지. 그저 순환하는 삶을 사는 아그눈의 자식이, 지금 당신과 눈을 맞추고 대화할 수 있음이 얼마나 확률적으로 희박하고, 동시에 즐거운 일인지. 자신이 고향을 떠나며 겪은 새로움에 대해 늘어놓을 때면, 더없이 낭만적인 묘사에 같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맞는 것인지에 의문마저 들게 한다. 그저 허울 좋은 소리로 들릴 수도 있지만, 한 문장 한 문장을 읊을 때마다 눈을 빛내는 것을 보자면, 아마 거짓은 아닌 듯싶다. (물론 받아들이는 이에 따라 감상은 무궁무진하겠지만) 다만 제 낙천적인 세계관이 지금의 암울한 시대와는 동떨어져 있음을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기에, 대부분의 경우 말을 아끼는 편이다.
수호자
기타
[색을 줍는 자들, 아그 눈]
- 식물, 혹은 광물로부터 염료를 제작하고, 또 그 염료로 직물을 염색하는 기술에 특화된 부족. 그 때문에 부족 고유의 언어로 ‘색을 줍는 자들’이라는 의미의 ‘아그 눈’이 부족명으로 굳어졌다고 한다. 오십 남짓한 구성원 중 아주 어린 아이를 제외한 대부분의 구성원이 양모와 식물 섬유를 이용한 직조, 염색, 자수, 실을 이용한 장신구의 제작에 능숙하고, 어릴 때부터 공용어와 부족 고유의 언어를 모두 사용할 수 있도록 교육받는다. 아그 눈의 젊은이들이 짜낸 양모는 쉽게 해지지 않으며 가볍고, 광택이 돈다.
- 계절에 따라 이목(移牧) 생활을 하는데, 주요 정착지는 돌랄 초원 중에서도 남단, 동시에 산과 인접한
동쪽 평원에 있다. 겨울이 다가오면 주요 정착지에서 지내며, 겨울 시기에 파종하면 봄쯤에 수확이 가능한 보리 혹은 부족에 의해 개량된 염료 식물을 재배한다. 동시에 가장 많은 직물의 생산, 염색이 이루어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후 풀이 자라나는 봄이 시작되면 주요 가축인 양을 유목하기 위해 정착지를 벗어나 이리저리 이동하며 유목한다. 또한 돌랄 내 타 부족의 거처를 순회하며 만들어낸 장신구, 직물, 옷, 염료 등을 다른 부족의 가축, 식량, 기타 필요한 물품들과 물물교환한다. 어떤 부족이냐에 따라 천차만별이긴 하나, 대체로 그들이 만들어내는 직물과 염료에 대한 타 부족의 선호도는 제법 높은 편이다.
- 금혈석 : 금혈석은 매우 무른 광물로, 광상은 표토 바로 아래 위치한다. 흔히 뿌옇고 누런 결정 사이에 붉은색 균열이 여럿 존재하는 형태를 띤다. 순도가 높다면 그 자체로 심미적 매력이 있고, 동시에 금혈석의 붉은 부분은 갈아 염료로써 활용할 수 있다. 그 색은 매우 선명하게 붉은데, 마치 변색되지 않은 혈액과 같다 하여 그러한 명칭이 붙여졌다 전해진다. 때문에 금혈석으로 만든 염료의 가치는 보통의 염료보다 훨씬 높다. 지금까지 유일하게 돌랄 내에서 금혈석의 존재가 알려진 광상은 부족 정착지로부터 가까운 산맥에 있기에, 아그 눈에게 매우 중요한 자원으로 여겨지고 있다.
[부족 사상]
“소유는 불평등을, 불평등은 투기를, 투기는 피를 부른다.”
- 여타 돌랄의 부족들이 그렇듯, 아그 눈 내의 공동체 의식은 매우 강한 편이다. 동시에 구성원 개개인 사이의 동등함에 대해 강조하기 때문에 사유재산의 개념이 희미하다. 모두가 배부르거나, 혹은 모두가 굶주리거나.
- 특이한 점이 있다면, 아그 눈의 부모 자식 관계는 혈통에 근거하여 구성되지 않는다. 아이들은 낳은 이들로부터 이름을 받은 자식이 아닌, 부족으로부터 아그 눈의 아이들로서 이름을 받는다. 성인식을 치르기 이전의 아이들은 모두 아그 눈의 자식이요, 어른들은 누구랄 것 없이 모두 부모이다.
- 족장이 존재하기는 하나 계승이 직계 자손에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그 눈의 족장이 어떤 자격 조건과 기준으로 선정되는지는 아직 청소년인 얀디누와에게 알려진 바 없다. 다만 지금까지 선정된 족장들은 모두 사욕이 아닌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힘쓰는 일꾼들이었다 전해진다.
[고향에서의 삶]
- 얀디누와는 자신의 바로 앞 손위 형제(지금은 그도 부모가 되었다)와 나이 차이가 제법 많이 나는 편이었기에, 몇 년 동안 맏이로 지냈다. 봄에서 가을까지 거주지에 남은 두셋 정도의 노인들은 제외하고는 모두 양을 유목하러 떠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동생들을 보살피는 것은 그의 몫이었다고.
- 맏이라고 한들 그 또한 아이일진대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않았던 것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행해진 교육뿐만 아니라, 그가 진심으로 동생들을 가족으로서 사랑하기 때문이다.
- 동생들은 그를 곧잘 '얀'이라고 불렀다. 그 또한 그 애칭을 좋아했다.
[호불호]
- like : 머리를 땋아주는 것, 푸른 색, 장신구, 무엇이든 새로운 것,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사람, 동생들.
- dislike : 이유없는 악의, 의미없는 반복.
[수호자로서]
- 얀디누와는 맹약자가 된 후, 자신의 의지로 부족을 떠나 가르멜로 향했다. 부족의 지탄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걱정 마, 꼭 돌아와서 이야기를 들려줄게.
- 얀디누와가 수호자로서 환상종으로부터 받은 힘은 유연함과 뚫리지 않는 가죽. 창칼을 막아내는 가죽은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을 지키고, 유연함은 비단 관절의 움직임에 통용된 것이 아닌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신체 변화를 유도하는 힘이 된다. 수호자인 만큼, 신체 말단을 앙그루와나와 동화하는 것도 가능하다. 다만 적의 시선을 끌어내는 주술적인 행위는 환상종 본체가 행한다. 얀디누와가 요청하면, 그가 들어주는 식이다.
- 양 어깨와 팔에 걸쳐 나타나는 문신은 소환진이다. 자세히 보면 앙그루와나의 얼굴에 나타나는 문양과 비슷한 것을 알 수 있다.
앙그루와나
초원의 천구가 모두 별빛으로 수놓아도 잠이 오지 않았던 한 아이가 똘망똘망한 눈을 빛내며 얼굴을 덮던 담요를 걷어낸다. 졸리지 않은데 밖에 나가면 안 돼요? 불만스럽게 입을 비죽이는 아이가 혹여나 몰래 밤하늘 아래를 거닐지 않도록, 어른들은 입을 모아 겁을 주었다. 달빛마저 비치지 않는 밤에는 절대 밖으로 나서선 안 돼. 커다랗고 반짝이는 이빨과 올빼미보다 밝은 눈을 가진앙그루와나가 네 모든 소망을 삼켜버릴 거야. 충고를 시작으로, 욕심쟁이 크누고타와 앙그루와나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앙그루와나는 북슬북슬 거리는 검은 털로 뒤덮인 짐승, 얼굴은 근육과 가죽 없이 하얀 뼈가 드러나 마치 탈처럼 보여. 그 위로 여러 색상의 기묘한 모양의 문양들이 빼곡해. 짐승보다는 사람의 치아에 가까운 평평한 이빨 틈새로 기다란 혀가 날름. 움푹 팬 눈두덩이 뼈 안으로 빙글빙글, 빨갛게 빛나는 큰 눈이 들어찼지. 얼마나 크냐고? 어떤 이는 집채만 하다고, 어떤 이는 주먹만 하다고도 해. 또 누군가는 발굽이 있다고도 하고 누군가는 날카로운 손톱이 있다고도 하지. 변덕스러운 만큼 제 몸체도 마음 가는 대로 바꾸는 거야.
하늘과 대지 사이 어떤 불순물도 없이, 지평선만이 펼쳐지는 초원 아래서는 누구도 쉬이 숨지 못해. 하지만 이 간악하고 영민한 짐승은 가느다란 나무 사이에도, 빈약한 바위틈도 아닌 밤에 숨어든단다. 초원의 키 작은 풀잎들을 감싸던 달빛마저 사라지는 삭이 오면, 앙그루와나는 별빛을 나침반 삼아 나아가는 이의 뒤에 따라붙지. 나그네 크누고타, 누구도 깨어있지 않은 고요함을 틈타 봇짐 가득 메고 달아나는 욕심쟁이! 그가 바삐 걸음을 옮기다가 어느 순간부터 깨닫게 되겠지. 북극성이 어디 있지?
별을 나침반 삼던 발걸음은 방향을 잃고. 하늘의 별이 사라진 것이 아니야. 무언가 저로부터 하늘을 가리고 있다고! 알아차린 후에는 이미 늦어버리고 말았지. 앙그루와나는 검은 털 속에 감춰 놓은 하얀 이빨을 꺼내 그의 머리부터 집어삼켰단다. 꿀꺽. 밤이 지나고 지평선에서 뜨거운 태양이 떠오를 때쯤, 다행인지 불행인지 크누고타는 제 두 다리로 걸어 마을로 돌아왔어. 그는 그 후부터 음식을 탐하지도, 빛나는 돌에 눈독 들이지도 않았단다. 검은 짐승이 그의 영혼 대신 욕망을 가져가 버렸거든. 사람들은 혀를 끌끌하며 속닥거렸어. 앙그루와나가 배가 불렀던 모양이지, 장난만 치고 돌려보낸 걸 보면.
성질
앙그루와나는 장난을 좋아하는 어린아이와 같다. 간악하고, 교활하며 동시에 순수하다. 언어를 모방하여 의미를 전달할 수 있지만, 그 맥락은 이성과 논리, 혹은 법칙과 같은 일직선의 길을 따르지 않는다. 구불구불하거나, 혹은 길이 끊겨있고, 심지어는 하늘을 향하고… 변덕스럽고, 그렇기 때문에 자유롭다. 그나마 오랜 시간 아그 눈 부족이 이 짐승과 공존하고 동시에 위협받으며 알아낸 습성 중 하나는, 앙그루와나가 인간의 욕망을 파먹는 것을 선호한다는 사실이다. 이미 누군가를 먹어 배가 부를 때에 한해, 희생양의 영혼을 송두리째 취하는 대신 욕망만 파먹고 돌려보내는 일도 있다. 비유하자면 음식의 가장 맛있는 부분만 먹고 버리는 것과 같을지도. 하지만 얀디누와와 약속을 채결한 후부터는 이러한 특성은 사라진 듯하다. 이유는 불명.
앙그루와나가 얀디누와에게 충성심이나 애정이 있는지, 아니면 그저 재미있는 장난감쯤으로 여기는지 알 길이 없다. 다만, 제 맹약자 홀로 있을 때면 종종 아그 눈의 언어로 말을 걸어오는 것이다. 얼굴 복잡해. 왜 없는 척 해? 재미없는 척. 걸어오는 말을 무시할 때도, 말에 답할 때도 있지만 대체로 대화의 문맥이 매끄럽게 이어지지는 않는다.
약속의 계기
큰일이야, 키누가 밖으로 나갔어! 셋째가 다급하게 뛰어 들어와 외친다. 동생들의 이부자리를 펴고 있던, 얀디누와에게 이 무슨 청천벽력같은 소리인지. 공기에 습기가 가시고, 열린 문틈 사이로 한기만 머금은 바람에 볼이 벌게진다. 가을이 끝났으니, 곧 그리운 아그 눈의 얼굴들이 돌아올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홉 살배기의 키누도 들떴는지 이번엔 어떤 것을 가져왔을까! 빨리 어른들을 보고 싶다며, 머리를 땋아주던 형제는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발을 동동 굴렀었지. 그때 서두르지 말라고 따끔하게 혼을 냈어야 했는데, 어린 동생이 귀엽다며 웃어넘긴 것이 화근이었던 걸까?
찾으러 다녀올게. 해는 이미 진지 오래였지만 그는 서둘러 외투를 챙겼다. 어른들도 한둘 있었으나 죄 무릎 나간 노인들이었으니 나설 이는 저뿐이었다. 그는 남아있던 동생들에게 절대 자신을 찾으러 나와선 안 된다는 신신당부를 끝으로, 손에 희미한 등을 들고 동생을 찾으러 나섰다. 얼마나 급하게 뛴 것인지. 생각보다 키누를 찾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오히려 우렁찬 울음소리를 달래는 것에 시간이 더 걸렸다면 걸렸지. 괜찮아, 집으로 돌아가자. 다리를 떠는 이를 안아 올려 굳은살이 떨어질락 말락 하는 발바닥을 딛으려는 순간.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내린다. 하늘이 캄캄하게 내려앉았다. 초원에 별이 뜨지 않았을 리 없을 텐데. 북극성이 어디 있지?
훅. 등 속의 불이 한순간 사라진다.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는데도. 아주 오래전 기억. 그러니까, 자신이 지금 안겨있는 동생의 나이 즈음에 들었던 이야기가 불현듯 떠오른다.
‘ 달빛마저 비치지 않는 밤에는 절대 밖으로 나서선 안 돼. 커다랗고 반짝이는 이빨과 올빼미보다 밝은 눈을 가진앙그루와나가 네 모든 소망을 삼켜버릴 거야.‘
어떻게 해야 하지? 그 어떤 이야기에도 그로부터 살아 돌아가는 법이 실려있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면 분명 눈을 마주칠 거야, 그렇게 되면. 손등이 덜덜 떨리는 와중에도 본능은 어떻게든 기억 속을 헤집어 최선을 제시해준다.
‘ 앙그루와나가 배가 불렀던 모양이지, 장난만 치고 돌려보낸 걸 보면. ‘
안겨 있는 이를 바라본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지 한 손으로 제 부은 눈가를 비비고 있었다. 키누, 너라도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