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 나는 겁이 많아 앞만 보는 천치거든. ”
그들은 나를 도망자라 하여 나를 그리 부르지 않아.
그런데 다른 곳의 치들은 날 ‘케렌’으로 부르더군.
재밌는 일이지 않나.
외관
*지인 커미션입니다. 감사합니다 :)
환상종과 사람을 가리지 않고 눈물을 머금던 아이의 눈을 기억하는가.
혹은 나뭇가지를 쥐고 있던 열 둘의 손을 기억하는가.
기억한다 한들, 그가 기억하지 못한다.
아니, 기억하지 않는다. 이미 존재치 아니한 흔적인 것이다.
- 1032년, 맛체바의 막사.
“그러니 내 뒤는 네가 지켜줘. 할 수 있지?”
떨고 있는 신졸의 어깨를 두드리는 손은 크지 않았으나 단단했다.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던 마르돌은 그리 말하며 눈을 마주한다. 신참은 그 손이 제 어깨에서 떨어져 내려갈 때, 손바닥에 빼곡하게 잡힌 굳은살과 닳아 사라진 지문을 보았다. 곱지 않은 손에는 갓 생긴 상처로 불그스름한 피부가 고스란히 보였고, 손가락 마디는 울퉁불퉁. 그렇게 한참 손에 시선이 가 있으니 마르돌은 ‘대답 안 줘?’ 하고 주의를 당긴다. 마주한 그의 눈은 파도가 물러간, 새벽 노을을 담은 바다와 같은 빛깔이었다. 해가 완전히 뜨지 않은 어스름하고 푸른 새벽은 습기가 어려있다. 그 청보라빛 눈에서 따뜻함과 신뢰를 맛본다. 신참은 그가 웃고 있지 않았어도 그의 미소를 보았고, 제 어깨를 두드리던 손이 떨리던 것을 보았음에도 그의 뒤에 설 수 있었다. 마르돌에게는 그런 힘이 있었다. 두려움을 알기에 공감할 수 있었고, 그렇기에 무게를 감당할 수 있었다.
- 1035년 6월 초, 아그립냐의 선술집.
“그러니까, 아가리 닥쳐.”
수통 가득 곡주를 받아든 여자는 제 앞을 가로막은 놈의 어깨를 주먹으로 밀어내며 자리를 떴다. 이거 부스러기도 남지 않은 맛체바 아니신가! 하고 이죽거렸던 놈의 뺨에 침이라도 뱉어야 하나, 마르돌은 생각하지만 그러지 않기로 한다. 이런 곳에서 대거리질을 하는 것은 주인장에 대한 모욕이다. 쭉 뻗은 다리가 성큼성큼 주점을 가로지른다. 온 몸이 술에 절어 술내음을 풍겼음에도 걸음만큼은 군인의 것이다. 아직도. 흔들림이 없고 절도 있었다. 부대를 몰살시킨 주제에 고개 빳빳하게 들고 돌아다녀! 가래침과 함께 욕짓거리를 쏟은 남자의 발치로 커다란 망치가 쾅, 하고 내리꽂힌 것은 마르돌이 문지방을 넘기 전이었다. 자루에 묶인 오색의 띠로 남자의 눈이 돌아가기도 전에 멱이 잡힌다. 얼굴을 가로지른 상처가 벌어져 피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벌겋게 충혈된 눈 가운데에 새벽같은 눈동자만이 방향 없는 한기를 품는다.
성격
담기지 않는 그릇
느즈러진 규칙
목적 없는 삶
그는 무엇도 담지 않기로 했다. 그의 아비가 어린 마르돌에게 주었던 가죽 가방은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애초에 마르돌은 금이 간 그릇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무엇을 담든 깨져서 결국 쏟아내기만 할 터다. 쏟아지고 토해내고. 쏟아진 것들은 떨어지고. 그저 제 속에 묻은 흔적만을 겨우 움켜쥔 채로 걷기만 한다. 그렇게 걷고 걸어… 몰래 북녘을 돌아볼 즈음에는 그런 목소리들이 들린다. 너는 강한 밧줄과 수면 아래 닻이 될 것이라던 자, 커다란 배를 만들어 바다를 항해하라던 다정한 이, 힘을 통해 증명해 보라던 사막의 꽃, 마음을 비우든 채운 것들을 지켜낼 정도로 강해지라 선택지를 주었던 자, 수천의 약속과 대답들.. 하지만 그런 말들은 결국 바람에 실려 밀려난다. 무슨 답을 했었는지 부러 외면하여 스스로 고독을 선택한다.
“아버지. 담을 것을 고르는 건, 결국 무언갈 포기한단 것이더군요. 그래서 저는 담지 않으렵니다.”
“내 그릇을 크게 본 모양입니다. 애정도 결국엔 마르기 마련이더이다.”
이전에 견고했던 규칙들마저 엉망이 되어 뒤섞인 채다. 그의 행동을 보라. 그는 전사인가, 군사인가, 아이인가 어른인가. 영웅이었다 주정뱅이가, 그리고 종래에는 구원자라 불린다. 암초의 틈에서는 비겁자가 되었으며 사막의 가운데에서는 무능한 영웅이, 산자락이 장승처럼 버티고 선 곳에선 불청객이었다. 장식하는 이름은 많지만 그 모든 것은 마르돌을 향하고 다시 향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도망자’일 뿐이다. 영웅으로 추대하겠다던 네 민족의 목소리와 손아귀에서, 족적을 밟아 따라 오는 족쇄같은 시선과 기대에서 혹은 질타에서. 차라리 바위틈의 몽돌, 바다의 조약돌로 있던 때가 나았다 읊조린다. 물줄기 하나 흐르지 않는 곳에서 파도 소리가 시끄럽다며 머리를 싸맨다. 하지만 그마저 술에 빠진 자의 주정으로 취급되니 누가 그에게서 목적을 찾을까. 기억되지 못할 바에는 남기지 않는게 나았다. 기억하지 못할 주제라면 담지 않는게 옳다. 실로 미련하다 웃은들 그마저도 잊을 것 아닌가.
“쉬이. 조용히 해, 마엘. 지긋지긋한 소리가 나잖니. ”
“그래 집으로 돌아가자. ‘그곳’ 아니라 집으로 돌아가는 거다.”
용병단 단장
그런데 그 용병단에 사람은 없어.
혼자 남은 건지, 애초에 받지를 않는 건지.
그것을 용병이라 부르는게 맞는지 의문스럽기도 하네.
기타
1021年~1037年
- 1021, 스페쿠가르로의 귀향
- 1025~1026, 아그립냐 상단 소속
- 1026, 아그립냐 야전부대 1정찰대 소속
- 1029, 대(對)환상종 부대 ‘*맛체바’ 편입
- 1030, 아그립냐 동부 해안 (마-샤라 해역) 사라탄 토벌
- 1035, 5월 *퇴역(退役)
- ~현재, 스케네마 중부지방 용병단 활동
[각주]
* 맛체바: 아그립냐 군부에서 1028년 조직한 대환상종 부대로, 아그립냐 동부 및 남부 해안의 탐사와 환상종 토벌을 주 임무로 한다. 맹약자를 중심으로 부대가 편성되며, 맹약자는 맛체바의 사령관으로 임명된다.
* 퇴역: 1035년 남부해안 교전 사건이 기점이 된다. 맹약자를 선두로 한 부대는 여타 국민의 많은 기대와 염려를 한 몸에 받았으나, 교전 사건에 의해 여론이 기울었다. 당시 맛체바 소속 대원은 사령관 이외 전원 사망 및 부상, 실종되었다. 아그립냐 군사 정부는 해당 부대의 목적이 ‘환상종 토벌과 민가 보호’였음을 강조하여 사령관인 맹약자에게 훈장을 수여한다. 이에 피해자들과 유가족들의 항의가 거세진 바, 맛체바의 사령관은 퇴역한다. 혹자는 불명예 퇴역으로 부르기도 한다.
케렌, 스페쿠가르
1025년 여름,
수평선이 일렁인다.
위대한 안다르타는 바위섬의 꼭대기, 등불의 집에 머무른다. 문을 열면 걸리는 것 하나 없이 바다 끝자락에서 바위섬으로 다가오는 배들을 보기 위함이었다. 오늘따라 수평선이 불규칙하니, 분명 파도가 높았을 것이다. 아침 일찍이 나갔던 배가 비어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흉이 되지 않을 날이다. 다섯 척의 배가 돌아오고 있었다. 아네는 그 가운데에 선 배를 바라본다. 만선이다. 그 아이가 타고 있을 배다.
아네는 그 아이가 돌아오던 날의 기억을 더듬는다. 모두 죽었을 것이리라 생각했던, 시신 없는 빈 배를 바다 위에 띄우게 했던 그 애가 맹약자가 되어 돌아왔다. 브린 자르의 선언을 전달받은 이후였다. 그 애는 사흘을 제 아비의 곁과 아네의 곁에 머물며 가르멜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작고 여린 이 애가 타지에서 홀로 지낸 것이 기특하면서도 안쓰러웠다. 그리고 일 년 뒤에 아네는 제 이름을 버리고 안다르타가 되었다. 피붙이같은 아이가 부족에서 섞일 수 있게 최선을 다했다. 아이는 사냥하는 법을 몰랐으므로 작살을 쓰는 법, 도끼를 다루고 활을 쏘고, 밧줄로 짐승의 숨통을 엮는 것까지 안다르타인 아네가 지도했다. 그 애 또래의 아이들은 배우지 않아도 될 것들을, 전장에 서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이것은 브린 자르의 전언에 기반한 것이었고, 그 아이가 원하였다. 제게 힘이 되어 주겠다 일렀었다.
안다르타는 아이가 그 모든 것들을 고대하였음을 진즉에 알고 있었다. 가죽을 품에 가득 안고도 시선은 늘 항해하는 자들의 뒷머리에 가 있었으니. 그런 간절함이 날개가 되었던 모양이다. 유약하던 아이가 부족에서 쓸모를 다지고, 힘이 되었다. 마르돌은 스페쿠가르의 ‘힘’ 그 자체였다. 마르돌의 손이 여물고, 단단해지며 그를 아이라 부르기 어려울 때가 되었을 때 스페쿠가르는 움직였다. 힘을 좇는 자들이 맹약자를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지성 있는 환상종의 힘, 부족의 것임이 명백한 맹약자의 힘은 그를 우두머리로 세우기 마땅하게 만든다. 안다르타는 그런 물음을 던진다. ‘너는 왜 그때 그 모습으로 돌아왔니.’ 불안함을, ‘너는 왜 그것에게 영혼을 주었어.’ 근본 잃은 의심을 담는다.
하여 안다르타는 스페쿠가르의 맹약자를 부른다. “이곳을 떠나, 마르돌.” 그 맹약자가 입을 벙긋거린다. 벙찐 얼굴 위로 배신감이 깃들지만 안다르타는 멈추지 않는다. “스페쿠가르가 흔들리고 있다. 너도 알고 있겠지. 가장 힘이 강한 자가 오르는 자리, 안다르타… 그들이 보기에 네가 더 적합할 수도 있겠어. 그래서 네게 제안한다.” 마르돌의 눈에는 눈물이 없다. 그저 붉다. “내 피로 채운 잔을 마시든지, 이곳을 떠나든지.” 안다르타는 저 맹약자가 자신을 죽이지 못함을 알고 있다.
아그립냐 남부 해안, ‘얌’ 그리고 ‘맛체바’
[1035년 03월 23일, 날씨 맑음]
남부 해안 ‘얌’으로 파견을 나온지 열흘하고 아흐레 되는 날이다. 오늘도 여전히 하늘은 청명하고 바다는 고요하다.
[1035년 03월 27일, 높은 파도]
파도가 높아진지 사흘이 되었다. ‘얌’ 마을 사람들이 이것 때문에 피해를 보는 일이 잦았다더니 드디어 모습을 보이려는 듯하다. 이 소름끼치는 파도는 멀리서 너울거리다 인간을 조롱이라도 하려는지 발치에서 솟아오른다. 빌어먹을 것. 모두가 놀라 도망이라도 갈라치면 다시 뒤로 물러난다. 이 꼴을 계속 보자니 정신이 아득해진다. 투입된다는 병력을 기다리는 방법이 최우선인가.
[1035년 03월 29일, 흐림]
본부에서 새 부대를 보냈다. 바다에서 눈깔 번뜩이던 녀석도 적수의 존재를 알아차리기라도 했는지 오늘은 바다가 흉흉했다. 부대의 선봉에 선 갈색머리의 기사는 (기실 노련한 기사라 칭하기엔 그’애’는 너무나 어렸다. 내 조카가 서른인데!) 푸른 클로크를 걸치고 왔다. 회색빛이 된 바닷가에서 그것만이 유일하게 청명했다.
[1035년 3월 31일, 폭우]
아그립냐에는 비가 오지 않아야 마땅하다. 흙을 바른 집들 중 약한 것들은 빗물에 패여 구멍이 나고, 어떤 담장은 무너졌다. 마을의 사람들을 모두 피난시켰기 망정이지, 반파된 시가지는 완전한 전장이 되었다. 부대가 파견된지 이틀이 지났는데 환상종은 잡힐 기색이 없었다. 교전이 밤낮 없이 길어진다.
저 자는 필경, 앞에 서는 법만을 아는 자로 보인다. 지키는 법을 알지 못하는.
이 불안이 기우이길 바랄 뿐이다.
[1035년 5월 2일]
땅에서 솟은 물기둥이 모든 것을 휩쓸었다.
부상자가 다섯, 실종자가 열 셋, 사망자가 열 일곱.
바다는 품지 않는다, 휩쓸고 삼켜낼 뿐이다.
- 주인 없는 일기장에서 발견한 기록
Mardöll
- 스케네마의 이방인, 이름 없는 용병단의 단장.
- 그 자의 곁에서는 항상 술내음이 나. 허리춤에 찬 수통을 기울이는데, 필히 술일 것이야. 그게 아니라면 횡설수설 늘어놓는 것들이 죄다 제정신이란 말이오? 큰일 날 소리!
- 돈도 받지 않고 제 발로 환상종 앞으로 뛰쳐가는 이상한 자일세. 맹약자라면 명부에 이름을 올려 영주가 되는게 이득 아니오? 누구 댁 아들새끼는 부모 호강시키자고 맹약자가 되겠다 나가, 목숨을 잃었는데 가히 배부른 짓거리지.
- 진정 우스운게 무엇인지 아나? 내 아는 용병놈이 말하는데, 저 자가 환상종의 머리를 따고 돌아오는 날에… 그러니까 마른 땅에 물기둥 솟을 적에, 꼭 죽을 듯 숨이 넘어갔다더군. 어떤 맹약자가 제 힘을 무서워 하느냐고!
- 그래, 그 날 그 작자의 수통이 비었다더라. 아주 또렷한 정신으로 물기둥을 세웠겠지. 이보다 더한 겁쟁이가 어디에 있겠어. 아니, 아니! 환상종이 아니라 제 힘이라니까! 그러니 겁쟁이라 하는 거 아니오?!
스케네마 중부지방, 영지 변두리의 한 여관
왁자한 소음이 한바탕 얽힌다. 분위기를 돋우던 악사들도 손을 내려놓고 드잡이질을 하는 두 사람을 바라본다. 멱이 잡힌 마르돌은 손을 더듬어 주인 모를 술병을 쥔다. 입에 털어넣어 보지만 빈 병이다. 빌어먹을, 태연히 중얼거리는 꼴이 제 모가지를 틀어쥔 인간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단 태도였다. 그것이 A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이 X발 것이! 악소리를 내지르며 허리춤에 찼던 단도를 꺼내들던 순간, 마르돌은 쥔 술병으로 A의 머리통을 내려친다. 그리고 지껄이는 소리가 해괴하다. 마엘, 제발 입 좀 다물어 봐. 관자놀이를 얻어맞은 A는 눈알이 튀어나오는 고통을 느끼지만 저 여자가 하는 소리에 기가 차 삿대질을 한다. 이리 포악한 자가 우리 마을에 있는게 말이 된단 말이오! 빌어먹을 케렌인! 저 자가 야만의 집단, 케렌의 떨거지요! 발치에 도는 것을 보게나, 이 스케네마에 얼지 않는 물이 가당키나 합니까!! 선포, 또는 선교와 같은 말들이 이어진다. 주둥이만 남은 술병을 쥐고 마르돌은 그를 내려본다.
나뒹구는 A의 앞에 의자를 끌고 와 무릎에 팔꿈치를 기대어 앉은 마르돌은 깨져서 날카롭게 벼려진 술병으로 A의 아래턱을 타고 목젖을 누른다. 피가 맺히는 것을 무감히 바라보았다. 너, 이곳을 누르면 숨통보다 말소리가 끊긴단다. 알고 있니? 그리 말하는 목소리가 자장가마냥 다정하여 A의 눈이 주변을 황망히 더듬는다. 혀를 자르면 피가 너무 나서 죽을 수도 있으니 이곳으로 해주마. 나를 케렌의 것으로 칭해준 보답이란다. 그리고 팔을 치켜든다. 주변에서 관망하던 자들이 헉, 하고 숨을 들이키니 마르돌은 허공에서 손을 놓는다. 마룻바닥과 투박한 유리가 부딪히는 소리를 끝으로 그는 층계를 올랐다. 흡족한 낯이다.
마르돌은 간만에 기분 좋게 침실로 돌아왔다. 이런 소득도 명예도 없는 주먹다짐은 생각의 깊이를 야트막하게 만든다. 깊은 생각은 쓸데 없는 감상을 남기고, 잊고자 발버둥친 기억들을 끄집어 낸다. 하루는 바다, 하루는 사막, 하루는 지하의 도시… 거기까지 다시 생각이 미치자 손에 낀 장갑을 바닥에 내팽겨친다. 너 가장 최악의 기억이 뭐야. 스스로에게 묻는다면 마땅히 가르멜이라. 그 구역질 나는 다정과 따뜻함이렸다… 여관 주인이 미리 받아놓은 세숫물로 얼굴을 씻는다. 눈물이 마른 눈이 건조하여 화끈거린다.
샤먼
피부 아래에는 피와 함께 해수가 흐른다.
무엇이라 부른들 결국엔 흩어질 이름이다.
다만, 역사의 무게를 지닌 자야.
현상을 이어 다리가 되어라.
우리가 한 약속을 영혼에 새겨라.
마엘스트롬
큰 소용돌이, 육지의 물기둥
바다는 모든 육지의 물들이 모이는 큰 그릇일지니, 땅 아래에는 해수가 흐르는 것이다. 아이의 손바닥만큼 작은 것부터 집 한 채를 집어삼킬 정도의 이르는 경우가 많았다. 괴물의 발톱으로 만든 무기가 땅을 가르면 현상은 응당히 육지 위에 물기둥을 만들어낸다. 그것의 중심은 압력이 낮아, 큰 기둥이 솟을 적엔 하늘까지 회색빛으로 변모했다.
성질
형체가 없는 그것은 발 밑의 물웅덩이로, 찻잔 아래의 회오리로 또는 공기중에 나부끼는 동그란 물방울로 남아 맹약자의 곁을 맴돈다. 맹약자의 가는 길에 수로가 있다면 뛰어들어가 물길마다 소용돌이를 만들고, 그가 든 술잔 안을 휘돌았다. 쉼이 없이 제 맹약자의 곁에 머무른다. 현상의 친우되는 인간종의 걸음마다 물자국이 남고, 맹약자 되는 인간의 말소리에 파도소리가 함께 들리는 이유다.
마르돌이 이젠 그를 무시하지 않음에도 항시 눈 앞에서 꽃이 되고 소라 껍데기가 되었다가, 문자가 되어 보인다. 그리고 속삭인다. 마르돌, 집으로 가자. 술에 취해 눈이 흐린 자의 앞에서 바다의 소리를 읊조린다. 그 모든 행위가 제 맹약자를 술독에 담금질하는 줄은 모르는 눈치다. 마르돌도 그것을 구태여 말하지 않는다. 다시 바다를 입에 올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마엘스트롬, 소용돌이의 중심되는 자, 마르돌.
약속의 계기
세 번째 항해.
밤의 바다는 짐승의 아귀다. 생을 먹어치우며 몸을 부풀린다.
불안에 종용당한 자는 밤을 깨우고 닻을 올린다. 애통한 마음이 바다를 울린다
익숙하게 노를 젓던 마르돌은 약속의 순간을 떠올린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면 바다 위로 솟은 바위섬이 다시금 성벽이 된다. 과거, 가르멜로 향할 적부터 돌아오지 못할 곳이었는지도 모른다. 바다가 바위를 때리고 바람이 배를 떠미는 소리에 울음소리가 묻힌다. 다른 부족으로 향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스페쿠가르는 마르돌의 전부였으므로, 정녕 바다를 떠나야 할 때임을 직감한다. 가슴을 내려치며 통곡하고 있노라면 소용돌이가 배를 감싸고 느리게 휘돈다. 지금이 대답을 할 때임을, 바다를 등진 자가 바다에서 난 것과 발을 맞추기 위해 가져야 할 순간임을 깨닫는다.
소리친다.
바다에게, 내가 버린 이들에게.
기꺼이 비겁한 도망자가 되겠노라 선언한다.
하나의 애원이었다.
“피부 아래 해수 흐르는 죄인이 간청하니,
이 발 아래 모든 곳이 곧 나의 숨이 되게 하라.”
하지만 마르돌, 이것 하나만은 기억해.
너는 다시 바다로 돌아올 거야. 우리의 품이 곧 네 숨이니까.
돌아와. 그래야만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