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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풍이 불어온다… 좋은 날씨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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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초 지대의 최남단, 해를 배웅하는 외로운 바위섬 ‘군타’ 출신

섬 주변에는 세찬 조류가 흘러 선박간에 죽음의 무도를 자아낸다.

항해 중에 출생했다.

거센 풍랑 한가운데의 일이었다.

외관

                  깊은 바다를 닮은 눈을 본 적이 있다. 해변가의 청명함보다는 거센 물결과 그 혹독함을 보여주듯 깊은 남색을 띠고있는 눈동자. 동시에 그 어떠한 일이 물 위에서 벌어지든 절대 요동하지 않는 바다가 에이리크의 눈동자에 담겨있었다. 그는 강단 있는 인상을 가졌으며, 차분하게 내려간 눈꼬리나 오똑하면서도 끝이 동그란 콧망울에서 어린 나이다운 소년미가 느껴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결코 소년에게서 느낄 수 없는 무게감 또한 동시에 묻어져나왔다. 케렌 출신답게 그의 흑색 머리칼은 바닷바람에 자주 휘날리곤 했는데, 가끔 해가 비칠 때면 머리카락 또한 눈과 같이 짙은 남색으로 빛나곤 했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거친 바다 생활을 한 탓인지 손가락에는 생체기와 굳은살이 박혀 투박하다. 투명한 그의 피부가 햇빛에 그을음지지 않은 이유라면 그가 머물고 있는 지역이 항상 물안개로 뒤덮여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근처에 서면 바다 특유의 소금기와 시원한 향이 느껴졌는데, 이 모든 요소들이 에이리크 자신의 출신지와 민족성을 증명하는 듯 했다.

맹약자

성격

강인한 의지  ·  대범한 도량  ·  냉철한 결단력

 착실한  ·  소탈한 ·  끈기 있는

 

                   어떤 이들은 다 자라기도 전에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그들은 타인에 비해 성장통을 적게 겪으며 그저 정해진 순리대로 깨우친다. 에이릭은 그런 종류의 소년이었다. 언어를 모르고 울음소리로 의사 표현하던 젖먹이 시절의 일이야 누구라도 고만고만하겠다만 두 발로 걷기도 전에 헤엄치는 법을 터득한 소년에게는 어딘가 비상한 구석이 있었다. 능력의 특출남을 떠나 그에게 깃든 침착함, 이는 기묘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해안가 틈에서 바다 거북을 발견해 활짝 웃는 천진함이며 또래 아이들과 내기를 하겠다고 커다란 선박 주변을 빙빙 돌다 넘어지기까지, 양 손 가득 움켜쥐어도 채 담지 못해 흘러넘치는 감정들로 장식된 추억이 그에게도 무수히 많다. 다만 에이릭이 유년 시절부터 남달리 차분한 소년이었으며 이는 내성적인 면모나 소극적인 태도와 엄연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일희일비 하지 않는 내면은 차라리 큰 물에 가깝다. 그곳에 조약돌을 던지든, 암석 덩어리를 던지든 이물이 일으킨 파문은 잠시간 수면 위로 솟아오를 뿐 물길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일찍 철이 들었고 어른 눈에 보기에도 거의 다 영글어가는 소년의 내면은 그래, 대양을 닮아있다. 담담하고 드넓다. 거의 모든 일에 괜찮다 답하고 실제로 전전긍긍하지 않는다. 항로를 찾기 위해서는 뱃머리가 가르는 파도가 아닌 먼 곳의 별을 바라봐야 하는 법. 섬에서는 배 위의 일을 생각하고, 선상에서는 바다의 일을 생각하고, 바다에서는 수평선 너머의 일을 생각하는 이. 매사에 숙고가 따르지만 그 고민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갉아먹도록 두지 않는다. 실질적인 의미에서 강인하고 굳세다.

 

                   그럼에도 소년의 심리가 아주 격정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을 것. 용서는 바다의 미덕이 아니며 암초가 무성한 지대에는 보리수 나무 한 그루도 자라지 않으니 그럴 수 밖에! 뱃사람 중 누구도 바람 한 점 불지 않아 파도조차 종적을 감춘 지대를 들어 평화롭다 하지 않는다. 북풍이 불면 돛과 노를 잡고 씨름하는 것이야말로 자연의 순리다. 그는 인간으로 태어나 전사로서 길러졌다. 아량이 넓고 맨눈으로도 멀리 볼지언정 사제와 정치가의 미덕을 알지 못한다. 판단에 있어 실리를 추구한다. 명예는 그에게 있어서도 유효한 가치지만 목숨의 경중보다 우선되지 않는다. 자신이 감당하는 선에서 해결할 수 있다면 제 선에서 마무리 짓고 인내한다. 혹자는 이를 희생이라 부를지라도 그에게 있어서는 크나큰 문제가 되지 않기에. 숙고를 거쳐 판단이 서면 행하기까지 막힘이 없다. 제 3의 방안을 찾아내 아직 누구도 가지 않은 야생의 땅을 밟아 길로 만드는 것 역시 주저하지 않으니 개척자로서의 재능이 있다. 계획이나 사건 앞에서 개인적인 감정은 최대한 배제하고 온전한 이성으로 상황을 바라보는 경향이 강하다.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다. 욕심이 없고 겸손하다. 양보가 몸에 익었다. 

 

                   스칼라그림의 아들 에이리크가 이런 소양을 지니게 된 것은 놀랍게도―그가 케렌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이다. 첫 들숨에 케렌의 공기를 마시고, 케렌의 전통을 존중하고, 케렌의 언어로 이야기하고, 케렌이 그에게 딛고 살아갈 대지 없이도 생존할 방도를 선사해주었기 때문에 그는 케렌이라는 명칭 하에 몇몇 유사성을 공유하는 무리의 민족성을 고스란히 물려 받았다. 우직한 강단 있으나 홀로 자라지는 않았다. 전투로서 개인의 강함을 증명하되 선상에서의 내분은 풍랑보다 더한 재앙일 것이다. 동료를 제 몸처럼 여길 것. 무예 아닌 맹위를 떨칠 것.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전투에 겸허히 임하라. 주변 사람들이 전해준 옛 이야기 속 인물들은 밤마다 꿈에 등장했고, 소년의 영혼은 바다에 있다. 제 본성처럼 강함을 추구한다. 단, 강한 자에게 따라오는 영광과 권리는 그의 눈 밖이다. 힘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던 소년은 승리보다 생존에 매료되었다. 따라서… 인류는 번성해야 한다. 제 민족을 살게 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일이든 서슴치 않을 것이다. 그것이 신의와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유망주에서 멸시와 배신감에 찌든 일갈이 등 뒤에 꽂히는 비겁자로 추락하는 일이라도. 

수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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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바랑고스 Varangos

  • 바다의 유랑 민족이 흩어진 케렌 지역의 최남단, 그리고도 서쪽. 아무도 넘어갈 수 없으리라 생각되는 소용돌이 해역 너머에 외딴 바위섬 하나가 있다. 인간종이 육안으로 확인한 해양의 끝, 군타. 대륙의 지도에도 기록되지 않은 섬을 기반 삼은 부족의 이름은 바랑고스다.

  • 그들의 기원을 아는 부족민과 타 지방의 민족은 바랑고시안을 패배한 조난자, 불운이 따르는 피난민으로 여긴다. 바랑고스는 어느 한 지파가 세력을 유지하여 이어져온 무리가 아니다. 케렌 전역에서 환상종에게 집과 터전을 잃고 어디에서도 구조되지 못해 세상의 끝까지 떠밀려온 사람들의 집합체다. 세상 어딘가에 적跡이 있었던 실종자들, 살아있는 망자들의 무리. 

  • 그러나 인간의 명맥은 끊기지 않는다. 생존자들은 선박을 무참히 부순 소용돌이를 향해 덤볐고 풍랑 속에서 파도 헤치는 법을 터득하며 차츰 영역을 확장해나갔다. 혹자는 바랑고스를 들어 패퇴의 악몽으로 세상 끝에 숨어버렸다 할 것이나 이곳에는 이곳만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상실을 겪은 인간이 어떻게 변하는지 지켜본 적 있는가?  두 번 다시 이 같은 치욕은 없을 것이라 서늘한 증오로 도끼의 날을 갈며, 세월이 오래 지난 현재에도 철혈의 맹세는 유효하다. 그들은 위대한 바이킹의 후예이며 핏줄을 타고 흐르는 것은 굴복을 모르는 전사의 야성이다. 

 

  • 부족민 스스로가 뱃머리를 밖으로 향하지 않는 이상 인근 선박의 출입은 허락되지 않는다. 대가의 문제가 아니다. 첫째로 타지인에 대한 배타성이 짙은 바랑고시안의 풍조가 그러하고, 둘째로 자연적인 방벽을 두른 탓이다. 제아무리 숙련된 항해자라 할지라도 군타 제도 앞의 조류에는 혀를 내두른다. 배를 가까이 대기만 해도 세찬 조류에 떠밀려가 암벽에 부딪히고 만다. 이 지대는 바랑고스 특유의 폐쇄성이 완전히 굳어지는 계기가 자리매김했다. 

  • 단, 예외가 있다면 조난자에 대해서다. 선조의 여정을 잊지 않은 그들은 섬의 암벽에서 육안으로 확인할 만한 거리까지 떠밀려온 사람은 적극적으로 구조하고 그가 회복할 때까지 온갖 자원과 도움을 아끼지 않는다. 저 해역에서 살아남을 정도의 행운을 지닌 자라면 바랑고스에도 좋은 바람을 몰고 와줄 것이라는 뱃사람 특유의 미신에서 기인한 선행이다. 

  • 바랑고스의 영역 외관에는 특이한 지형지물이 있다. 일명 난파선의 무덤. 승패에 상관없이 죽음의 무도를 거친 선박의 잔해가 흘러드는 곳이다. 망망대해 도중에 길다란 벨트를 형성하고 있으므로 인간의 힘으로는 그곳을 넘을 수 없다. 먼 바다를 항해할 만한 거대 함선을 머리 위에 지고 발 밑 불안정한 폐허를 넘거나 물리적으로 그곳을 훼손할 만한 무력이 있는 게 아닌 이상.

 

  • 현 족장은 ‘불사의 시굴드’ 라는 이름을 갖는다. 이때 사용하는 이름은 과거 존재했던 영웅의 위대함을 기리는 것으로, 만약 후대에 모두가 입 모아 찬탄할 만한 업적을 세우는 자가 있다면 족장을 가리키는 이름이 바뀔 수 있다. 근 이백년간 몇 번인가 전적이 있던 일이다. 

  • 사회에서 성인으로 인정받는 나이와 사망 연령이 평균적으로 낮다. 특히 전자는 일정 해가 된다고 해서 성인으로 거듭나지 않는다. 반드시 성인식을 거쳐야 하며, 때를 정하고 미리 마음을 먹는 것은 개개인의 몫이다.

  • 전투능력과 별개로, 한 사람의 선원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항해 실력을 증명해보여야 한다. 족장이 고안하고 뱃사람 다수결의 동의를 얻은 종목으로 시험을 치르며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는 해협을 이동해 지정된 섬들을 경유하는 것이다. 운이 나쁠 경우 사흘 이상 식량과 물 없이 버텨야 할 정도로 험준한 루트이고 환상종을 마주치게 될 위험도 산재해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아이들은 어린 나이부터 항해술 교육을 받고 시험을 완주하는 자신의 모습을 꿈꾸며 자란다. 바다를 유랑하며 살아가는 민족으로서 배를 타지 못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 시험을 통과해 정식으로 바다에 나갈 자격을 얻은 사람을 '스키파리' 라고 부른다. 성인식과 마찬가지로 시험을 치르는 데에는 연령을 포함해 아무런 제한이 없다. 자신의 능력을 객관적으로 돌아보고 준비가 되었다고 판단하는 것 역시 중요한 덕목이기 때문이다.

 

  • 금속을 구하기 위해서는 아그립냐 연안에 가야하므로 바랑고스에게 있어 철은 대단히 중요하고 귀한 자원이다. 그들은 철을 단 두 가지 용도로 사용한다: 무기와 닻. 

군힐드와 스칼라그림의 아들, 에이리크. 

  • 현 족장이 그에게 있어서는 백부가 된다. 어릴 적 부모를 여의었으나 고아가 많은 바랑고스 내에서는 공동육아가 흔하다. 하물며 어린 피붙이를 거두지 않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자손을 많이 보는 바랑고시안답게 위로도, 아래로도 다양한 성격을 지닌 형제자매들과 어울려 자랐다. 제 몫을 조금 덜어내 남에게 권하는 버릇은 동생들을 돌보며 생겨난 셈이다. 

  • 손재주가 좋고 로프를 잘 다룬다. 많은 일을 직접 해결해야 하는 유랑생활에서 이런 재능은 꽤나 선망받는 것이라, 형제가 장난스레 어깨에 무게를 실으며 ‘넌 전통을 좋아하니까 옛날 방식대로 함을 만들어서 청혼해라’ 하는 이죽임을 건넨 적 있다. 당연히 그럴 생각이었다는 뉘앙스의 눈빛을 보고는 완전히 질린 듯이 고개를 젓더니 그 상대가 될 누이를 놀리러 갔지만. 

  • 뱃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쯤 가지고 다니는, 말그대로 온갖 용도로 사용하는 작은 칼을 바랑고스에서는 ‘아체’라고 한다. 아체의 짝궁은 ‘페콜르’다. 페콜르는 아체를 보관하는 주머니로 화려한 자수를 넣어 만들기 때문에 퍽 귀한 물건이다. 한 쌍의 물건이 대부분 비슷한 상징을 가지고 있듯 아체와 페콜르는 연인이나 부부의 관계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바랑고스에서는 남편 될 이가 직접 손잡이에 무늬를 새긴 아체를 선물하고 아내 될 사람이 연인을 위해 페콜르를 마련해주는 풍습이 있다. 현대에 와서 간략화된 청혼 방법이기도 하다.

  • 에이리크의 아체는 몹시 정교한 무늬가 새겨져있다. 손수 새긴 것이고, 그가 지니고 다니는 페콜르는 양어머니가 떠주신 것으로 그가 애착을 가진 몇 안되는 물건이다. 

  • 좋아하는 음식은 노이벳. 시큼한 맛이 나는 빨갛고 작은 열매로, 주로 고산지대에 분포해 있다. 에이리크는 노이벳이 열려있는 광경은 본 적이 없지만 종종 돌랄의 유목민이 지닌 자루에서 발견되는 이 열매는 상당히 즐기는 편이다. 바랑고스의 토착 요리법은 장기간 보존하기 위해 바닷물에 염장하는 것. 참고로 에이리크는 생열매를 으적으적 씹어먹는 것을 가장 선호한다. 바다에서 쉽게 맛보지 못하는 신 맛을 즐기는 것일 수도 있겠다. 


 

케렌 

  • 부족은 소년에게 있어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바랑고스라는 정체성을 공유하는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그가 일생을 다해 갈고 닦을 것은 바이킹의 정신이었으니 이는 케렌 지대를 항해하며 살아간 전사들이 이룩한 것이라. 맹위 뒤편에 오는 야만성과 흉포함마저도 에이리크는 긍정한다. 그는 자신이 받은 것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후대에도 전해지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 단 하나,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할 것은 생존의 문제라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았다.

  • 소년이 납득하지 못한 명제들이다. 또한 이는 절대적인 원칙으로 여겨진다:

스페쿠가르 이북의 해역으로는 갈 수 없다.

환상종의 힘은 추구해서는 안되는 금기다. 

  • 어째서? 에이리크는 반문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또 때로는 이런 자신이 불경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여지껏 전통과 선조의 가르침에 자긍심을 느끼고 온 힘을 다해 흡수하려 했던 것은 제 자신이 아닌가. 지난 나날이 마치 한 철의 변덕이었던 것처럼 무엇을 보아도 싹트는 회의와 번민은 모두 자신이 충분히 굳세어지지 못해서가 아닐까 하고. 

  • 뱃사람에게는 사랑보다 억누르기 힘든 열망이 있다. 자유에 관한 것이다. 

  • 케렌이 그에게 배 모는 법을 가르쳤으므로 소년은 눈꺼풀을 열고 닫을 때마다 수평선 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또한 케렌이 그에게 강자가 되어라 담금질 했으므로 에이리크는 그렇게 했다. 포식자로 정해진 종을 모방해 기적을 손에 넣겠다. 그러고 나면 비로소 세계를 상대로 원하는 바를 행사할 자격이 갖춰지는 것 같았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대가로서 영영 바다 아래를 떠돌게 된다면 육신의 마지막으로 그보다 더 만족할 만한 최후가 없다고 여겼다. 

 

바다는 어디에 있습니까. / 눈을 들어 보아라. 네 앞에 펼쳐진 물이 전부 바다다. / 바다는 무한한 것이란 가르침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끝을 등지고 있군요. / ……. / 야케칸. 우리가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  있을까요. 허기에 제 살을 파먹으며 그것이 곪아드는 줄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맹약자

  • 제 선택에 당위를 가져다붙이지 않았다. 노여움으로 치를 떠는 형제들과 배신감에 이를 악문 누이들의 앞을 지나쳐 자신이 한 것을 모두의 앞에서 낱낱이 알렸다. 누구보다도 케렌의 유지를 잇는 자이며 진정한 바랑고시안이 되겠다 칭찬받던 이였던 탓에 모두 쉬이 입 열지 못했다.

  • 추방자가 되어 관혼상제의 권리를 모두 박탈당했다. 잠정적인 파혼 역시 당연하다. 

  • 환상종에게 영혼을 내준 이후 수영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정확하게는 물에 뜨지 않는다. 본인 말에 의하면  ‘심해로 끌어들인다’는 모양. 환상종의 힘을 빌리자면 구태여 못 나올 것도 없지만 맹약으로 자연과 합일된 신체로는 수면 위와 아래가 다르지 않으므로 아무래도 좋다는 쪽.

  • 추위와 더위를 느끼지 않으며 체온이 낮다. 

레비아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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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아탄 לִוְיָתָן / Leviathan

                   일명 물그림자. 바다의 어머니. 묘지기. 푸른 공포. 심해의 주. 

 

절대로 밤바다를 오래 들여다봐서는 안된다. 

검고 구불거리는 물살은 레비아탄이 쥐고 흔드는 이들의 머리카락이란다… 

 

                   뱃사람들의 주적主敵. 해수면에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나면 적습에 대비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케렌의 사람들은 일평생 거친 조류와 풍랑에 굴하지 않고 위험한 해협에서 항해하는 법을 익혔지만 인간이 침범할 수 없는 심해에 도사린 환상종은 여전히 그들의 재산과 미래를 위협한다.

                   레비아탄은 바다 민족의 오래된 숙적이다. 레비아탄에게 붙여진 악명과 온갖 끔찍한 구전설화는 이 바다 괴물에 대한 뿌리 깊은 증오를 여실히 보여주는데, 선박 하단에 충격을 주거나 거대한 물살로 휩쓸기만 해도 크나큰 규모의 재난으로 이어져 배와 사람 모두에게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히기 때문이다. 특히나 레비아탄의 영지와 가까운 서쪽 제도에 기거하는 바랑고스의 경우 이 괴수가 불러일으킨 해일로 인해 섬 전체가 쓸려나가 이주한 사건이 부족의 역사에 몇 차례 존재한다. 피해 입은 선박을 간신히 침몰 위기에서 건져 상태를 살펴보면 하단이 거칠게 뜯겨나간 흔적이 남았다. 암초에 부딪힌 것 같기도, 뭔가에 물어뜯긴 것 같기도 해 뱃사람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아주 유서 깊은 이야기 ─그러니까, 구전설화─에 따르면 레비아탄은 본디 바다에 빠져죽은 원념이 한데 모여 생겨난 존재다. 아이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 레비아탄이 온다는 얘기를 하는 것 역시 케렌에서는 으레 있는 풍습이다. 이처럼 특정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피해 입은 전적만 쌓여가는 탓에 산 자를 향한 적의를 지닌, 아직 규명하지 못한 현상계 환상종이란 추측이 주를 이뤘으나 비교적 최근에서야 동물계 환상종임이 밝혀졌다. 레비아탄의 꼬리를 목격한 선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생존자의 증언에 의하면 갑자기 주변이 어두워지기에 두꺼운 구름층이나 하늘에서 나타난 환상종인 줄로 알고 경계하며 위를 보았는데, 고래의 꼬리가 드리워져 해를 가리고 있었다고 한다. 

 

                   실상 레비아탄의 외견은 인어. 말그대로 상반신은 인간종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고 하반신의 형태와 그나마 유사한 것은 포유류 중 가장 거대한 어종인 고래다. 적의와 반감으로 마구 부풀려진 묘사 전부가 들어맞진 않겠으나 창도 뚫지 못하는 두꺼운 가죽과 비늘, 줄지어 날카롭게 늘어선 이빨, 강철을 덧댄 용골도 부수는 턱을 지녔다고 전해진다. 레비아탄에 대한 정보가 이토록 추측성에 가까운 이유는 이 괴수가 기본적으로 심해에 살며 바다 밑에 도사리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환상종에 불과할지언정 인간과 유사한 외양을 가졌다는 것에 흥미를 드러내는 이도 간혹 있었으나 맹약자는 레비아탄의 미추를 분간하지 않으므로 여전히 알 길 없다. 단, 몸길이만큼이나 길고 굽슬거리는 머리카락을 지녔으며 그 색은 어둠과 같이 검어 깊은 바다에서는 전혀 분간할 수 없다고 한다. 

크리쳐

성질

                   맹약자에게 강한 집착을 보인다. 곁을 떠나지 않으므로 뭍 위에서는 그의 그늘에 깃들어 있다. 물그림자라는 이명답게 에이리크의 그림자는 지상에서도 마치 해수면에 비쳐 흔들리는 형상처럼 자잘하고 끊임없이 물결친다.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주로 상반신 뿐이며 맹약자의 어깨에 팔을 감고 등 뒤에 매달리듯 나타나는 때가 잦다. 때마다 제각각 다른 크기를 투영해 바로 옆에서 얼굴을 들이밀기도, 고개를 젖혀야 눈을 맞출 수 있을 정도로 커지기도 하지만 대체로 마주하기에 어렵지 않은 범위인 모양. 의외로 인간종에게 별다른 적의를 품고 있지 않다. 보다 정확히는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 마음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흥미와 관심 범주에 그치는 반응 정도가 실재하고 결과적으로 혼란과 공허를 파생시킨다. 배려나 애정을 모르므로 그 관심이라고 할 만한 것이 인간에게는 해악을 입히는 재난에 불과했던 것. 지금도 맹약자의 몸을 상하게 할 때가 있으나 소년은 난폭한 애정을 불평 없이 감내한다.

                   에이리크는 자신의 영혼을 삼킨 환상종에게 ‘리위아’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영혼을 주었다 해서 레비아탄이 그가 귀애해야 하는 대상이 아닌 것은 자명한데, 한낱 감상에 휘둘리지 않을 만한 소년의 행동은 실로 불가해하다. 에이리크는 인간의 언어로 환상종에게 말을 걸고 교감으로서 화답받는다. 그가 종종 ‘리위아’에 관해 언급하는 태도는 친근하기까지 하다. 레비아탄은 맹약자를 통해 외부 세계를 관측한다. 본능적으로 반대 성질을 기피해 역으로 잠식시킨다. 이를테면 뜨겁고 밝은 것. 충만하고 타오르는 것. 빛조차 없는 밤과 냉기, 영하의 온도와 어둠, 비리고 습한 것, 파괴 그 자체, 무한한 황량함이야말로 레비아탄의 속성이다. 한편 해저에서 암약하는 생명들과 물길의 흐름을 양 팔에 안았다. 만물이 하나를 향해 흐르는 자연의 섭리와 사멸하기 위해 태어나는 원초의 부화를 주관한다.

약속의 계기

                   사냥철이었다. 그 해는 유독 해양생물이 번성해 사냥철의 인기가 높았다. 모두들 호기롭게 가장 많은 수확을 거두는 사람은 자신일 것이라 떠들었고 일출부터 일몰까지 배를 타고 헤엄을 치며 시간을 보냈다. 에이리크가 탄 배는 대형 어종을 노렸고, 때문에 가까운 바다까지 나가 파도 위를 탐색하며 추격할 만한 사냥감을 기다렸다. 그들은 노련한 사냥꾼답게 몇 시간에 걸친 대기에도 굴하지 않고 집중력을 잃지 않았는데, 해가 정수리를 넘어가고 나서야 그 결실을 맺을 기회가 왔다. 신속하게 던져지는 작살들. 몇 개는 명중했으나 사냥감의 힘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작살과 연결된 밧줄을 매어두는 지지대가 통째로 부러졌다. 그동안의 노력이 고스란히 물거품이 되려던 찰나, 에이리크는 몸을 날려 로프의 끝을 거머쥐었다. 배 위에서 힘겨루기를 하겠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가 바다 깊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수면 가까이에 매어두는 동안 따라온 동료들이 무기를 정비하고, 협력하여 근거리에서 부상당한 사냥감을 끝내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다. 

                   밧줄을 한 팔에 단단히 감은 채로 얼마나 헤엄쳤을까. 예상 외로 거센 저항에 그가 슬슬 줄을 놓아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판단할 무렵, 수중에 어른대는 그림자가 시야에 잡혔다. 어느덧 난파선의 무덤까지 떠내려온 것이다. 거인의 손아귀에 마구 짓눌려 하나의 몸체처럼 엉겨붙은 잔해는 서로 연결되어 물살에 오르내리기를 반복했다. 에이리크로서도 금기시되는 이 지역을 맨눈으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내내 유지하던 긴장이 풀려 줄을 놓치고 말았다. 아차 하는 순간 밑을 내려다보고, 발견한 것은… 죽어가는 고래의 사체였다. 아니, 사체가 아니라 깊은 상처를 입어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순리를 따라 무덤을 찾아온 고래. 어쩌면 이번 사냥철을 맞아 인간에게 상처를 입은 것일수도 있겠다. 거리가 멀기는 해도 사람을 불러온다면 많은 양의 식량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에이리크는 얼어붙은 채 아득한 심해로 멀어지는 고래의 몸체를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고래를 이토록 가까이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고 정확히 시선이라고 할 만한 교감을 나눈 것도 난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는 전사였고, 본디 사냥감을 동정하지 않는다. 에이리크의 의식을 강제로 깨운 것은 호흡이 모자라다는 신체의 반응이었다. 팔을 들어올리며 생각하기를, 방금 전까지는 해가 일렁이던 것 같은데. 그새 날이 흐려졌나? 어떠한 자각이 뒷통수를 찔렀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본능적으로 수면과의 거리를 재고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라는 예감을 했다. 극심한 추위가 거죽을 뚫고 뼛속에 스몄다. 아직도 그때만큼 완전한 암흑을 접한 기억이 없다. 

 

고래의 눈…

그것의 눈.

 

                   소년은 정신을 잃고 조류에 휘말렸다가 구조되었다. 저항이 불가능한 물살에 떠밀려 호흡을 놓쳤던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고 그는 해안가에서 발견되었다. 훗날 에이리크가 이 순간을 회고하기를, 바이킹으로서 그때 마땅히 취했어야 하는 행동은 즉시 동료들에게 환상종의 위치를 알리고 무기를 챙겨 공습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소년은 아무에게도 자신이 목격한 것을 발설하지 않았다. 그 날의 바다는 고요했다. 머릿속에서 자신이 본 것을 지우지 못해 오래 뒤척였다. 결사의 계획은 오래 전부터 그려왔던 것처럼 저절로 뇌리에 떠올랐으나 이 저울은 결단코 평행하지 않았다. 나머지 한쪽에는 그의 모든 것을 올려놓으라 요구할 것이었다. 

 

                   달이 뜨지 않은 밤이었다. 피아를 식별하기 어려운 암흑 속에서는 방향을 가늠하기가 어렵다. 초라한 나룻배가 용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전적으로 항해자의 역량과 경험에 의해서였다. 멀리에 유령선이 부유하는 것을 감지할 때쯤 배를 멈췄다. 시야 대신 청각을 곤두세우면 사방에는 불길하고 음산하게 판자 삐걱대는 소리 뿐이다. 간혹 환청이 귓가를 맴돈다. 켜켜이 쌓인 망자의 원념이 산 사람을 부르고 있다. 에이리크는 호흡을 가라앉히고 땀이 찬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그러다 수면에 눈길이 사로잡힌다. 절대로 밤바다를 오래 들여다봐서는 안된다…. 바닷물은 생각만큼 차지 않았다. 피가 식어있기 때문일까. 익숙한 촉각에 더욱 대담해지려는 찰나, 손바닥에 무언가가 스치는 것이 느껴졌다. 모골이 송연하다. 그러쥐어 눈 앞에 펼쳐본들 믿지 못할 것이다. 젖은 손을 꺼내어 노를 거둬들였다. 작디 작은 나룻배는 약간의 파도에도 위태롭게 들썩인다. 이곳에서 배가 난파된다면, 아니 뒤집히기라도 한다면 육지까지 헤엄쳐갈 체력이 없는 그는 수면 위로 등을 드러낸 채 바다를 떠도는 실종자 중 하나가 되는 것이다. 괴물을 생명줄 삼아 버티는 것이 아닌 이상... 터무니 없는 망상이로군. 에이리크는 균형을 잡으며 천천히 일어난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깊은 바다로 뛰어들었다.

 

이것은 기원을 되찾기 위한 여정.

앞으로 벌어질 일을 소년은 이미 알고 있다.

“   네가 불러올 파란을 온 대양이 고대하노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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